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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성 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0490
한자 忠州城戰鬪
영어의미역 Battle of Chungjusan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성내동 232-2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최규성김택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투
발생(시작)연도/일시 1231년 12월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231년 12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충주성 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지광수(池光守)|우종주(于宗柱)|유홍익(庾洪翼)|우본(牛本)

[정의]

1231년 12월 충주성에서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한 충주민이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

[역사적 배경]

몽고의 지나친 조공 요구로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깨어지자 몽고는 저고여(箸古與) 살해 사건을 핑계로 1231년 8월 고려를 침입하였다.

[경과]

1231년 8월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을 함락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거쳐 12월 초에 개경을 포위 공격하였다. 일부 별동부대는 광주(廣州)와 청주 등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충주를 공격하였다. 고려를 침입한 몽고군은 고려 서북부 지역을 유린한 후 12월에는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충주성은 몽고군이 삼남 지역으로 진출하는 데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무기와 식량을 많이 비축하고 있어 몽고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충주성에서는 몽고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부사 우종주(于宗柱)가 양반별초(兩班別抄)를, 판관 유홍익(庾洪翼)이 노군(奴軍)과 잡류별초(雜類別抄)를 거느리고 방어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매사에 의견이 달라 충돌해 오다가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충주성 방어 전략을 의논했지만 서로 의견이 달라 제대로 방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마침내 몽고군이 충주성으로 들이닥치자 우종주와 유홍익을 비롯한 방어 책임을 맡은 장수들은 몽고군의 기세 놀라 무책임하게 먼저 달아났고, 충주성 방어의 주력 부대인 양반별초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때 노군과 잡류별초만 끝까지 남아 지광수(池光守)와 승려 우본(牛本)의 지휘 하에 몽고군과 맞서 싸웠다.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하여 주민들이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항전함으로써 몽고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몽고군이 퇴각하자 도망했던 관료와 양반별초가 돌아와서 노군들의 승전을 치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관청과 민가의 은기(銀器)가 없어진 것을 빌미로 이를 노군의 소행으로 치부하며 벌을 주려 하였다. 그동안 노군이 관가와 민가의 은기(銀器)를 절취했다는 호장 광립의 무고대로 노군 대장을 죽이려 했다. 노군은 이듬해인 1232년 1월 “적이 침입하였을 때는 달아난 자들이 이제 와서 적이 약탈해 간 것을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려 하니 어찌 참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호족과 관리들을 수색하여 죽이는 등 난을 일으켰다. 이에 노군의 반란 소식을 접한 조정의 실권자 최우(崔瑀)가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소집하여 군사 출동 문제를 의논하였으나, 판관 유홍익이 사절을 보내어 무마하여 주기를 청하므로, 곧 주서(注書) 박문수(朴文秀)와 봉어(奉御)를 지낸 김공정(金公鼎) 등을 안무별감으로 보내어 난을 수습하도록 하였다.

[결과]

난을 수습한 이들이 노군도령 지광수(池光守)와 승려 우본(牛本)을 대동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최우는 지광수에게 교위 벼슬을 내리고, 우본은 대원사(大院寺) 주지로 삼고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노군의 불만이 다시 일어나자, 이 해 8월에 병마사 이자성(李子晟)을 보내어 평정하였다.

한편 고종은 충주 전투 이후 살리타에게 많은 선물과 함께 사신을 보내 사신 살해 사건은 금나라 사람의 소행이라 해명하니, 살리타는 고려에 다른 뜻이 없음을 인정하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의의와 평가]

충주성 전투에서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한 충주 주민이 몽고군을 격퇴함으로써 삼남 지역으로 남하하려는 몽고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충주 노군의 항전은 몽고의 제1차 침입 때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흔치 않은 항전이었다. 싸움을 주도한 노군은 공노비(公奴婢), 잡류별초는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지방민으로 여겨진다. 그뿐 아니라 평소 애국심과 애향심이 강했던 충주 주민이 흔연히 일어나 외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몽고군을 물리침으로써 충주 주민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충주성 전투의 승리는 뒤에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 최고의 격전이었던 충주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아***** 공부하다가 갑자기 충주성이 생각 났었는데 뭔지 까먹어서;;
ㅋ덕분에 잘 알아갑니다~~
201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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