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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동 성황사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363
한자 連守洞城隍祠址
영어의미역 Chungju Seonghwangsa Site
이칭/별칭 충주 성황사지,충주 성황사 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연수동 571-1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최일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당 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고려시대
소재지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연수동 571-1 지도보기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연수동에 있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 사당터.

[개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안종(安宗) 왕욱전(王郁傳)에 성황사(城隍祠)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996년(성종 15) 이전에 이미 성황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황에서 ‘성(城)’은 성벽을, ‘황(隍)’은 성벽을 둘러싼 공호(空濠, 물이 없는 해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성황은 성벽과 공호로 둘러싸인 도시를 의미하며, 성황 신앙은 성곽 도시의 수호신에 대한 도시인의 신앙 체계라 할 수 있다.

[변천]

한국의 성황 신앙은 중국의 성황을 수용한 것으로, 수용 주체는 신라 말 고려 초기의 지방 호족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성황사를 국가의 사전(祀典)에 등재하고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에 남단(南壇)을 두어 성황신을 국가적인 차원에서 제사 지내고, 지방에서는 군·현마다 성황사가 있어 제사를 지냈다. 1908년(순종 2) 성황당 제사를 폐지하고 그 터는 국유가 되었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택지 개발을 위하여 충주시 연수동 택지 개발 예정 부지 내 571-1번지와 476번지의 4,989㎡를 발굴하였다. 발굴 결과, 전면 3칸·측면 3칸의 건물 터가 드러났으며, 건물 터 5~10㎝ 밑에서 전면 4칸·측면 3칸의 건물 터가 드러났다. 지표와 발굴을 통하여 철제 말과 토제 말이 다수 수습되어 성황사 터로 추정하고 있다.

[현황]

현재는 택지로 개발되어 주택이 들어서 있다.

[의의와 평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호서읍지(湖西邑誌)』, 『충주군읍지(忠州君邑誌)』 등 지리지에 성황사에 대한 기록만 있을 뿐 위치와 규모를 알 수는 없었으나 발굴을 통해 성황사의 규모가 드러남으로써 당시 성황 신앙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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