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4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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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음역 | Iijae Gangjeomgi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신순철 |
[정의]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시기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의 역사.
[개설]
한일합병은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사건으로, 경술국치(庚戌國恥) 또는 일제병탄(日帝竝呑)이라고도 한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한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융합한 악랄한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고창 지역에서는 다양한 항일 운동과 더불어 예향의 고장으로서 여러가지 방법과 형태의 문화를 계승하기도 하였다.
[행정 구역과 생활권]
고창 지역은 고창읍 지역과 흥덕권, 무장권 등의 세 지역으로 생활권을 나눌 수 있다. 강점 이후인 1920년대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이들 세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행위가 이루어지고 각종 사회단체가 조직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운동이 전개되었다.
실제로 1914년 대대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면의 범위가 이전의 2~3배로 확대 재편되었으나 생활권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사회단체가 이 생활권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우체국이 고창·흥덕·무장에 각각 설치되고, 3·1운동 역시 고창·흥덕·무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데서도 알 수 있다. 반면에 고창 지역은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전라남도 지방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경우 전라남도 장성과 영광 지역의 동학 농민 운동군과 연계되었으며, 이로 인해 상당수의 농민군들이 영광 지역에서 최후를 맞기도 하였다.
[항일 운동]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에는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는 농장이 거의 없었던 반면에, 한국인 지주가 경영하는 농장이 다수 분포하고 있었다. 이것은 인근의 정읍·부안 지역과 다른 점이기도 하다. 부문 운동 가운데 청년 운동은 노동 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전개되었으며, 이들이 벌인 사업 가운데 모르핀 방지를 위한 예방과 치료 활동, 진료소 설치 등은 주목할 만하다. 노동 운동은 고창노동회와 무장노동회를 중심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두 단체 모두 야학을 설치 운영하고 있었는데, 오동균과 김승옥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3·1만세 시위 경력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한편, 고창 지역에는 뚜렷한 사상 단체가 없었음에도 1920년대 후반 혁명적 농민조합이 결성되었으나 주목할 만한 활동은 전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 운동은 3·1운동과 6·10만세운동 당시의 만세 시위, 그리고 불량한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기 위한 동맹 휴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또한, 비밀 결사 조직과 활동이 독서회 형태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3·1운동 당시에는 흥덕공립보통학교와 고창보통학교를 중심으로, 6·10만세운동 당시에는 고창공립보통학교와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있었다. 동맹 휴학 또한 고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도하였다. 한편,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S당이 결성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가 퇴학 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형평운동과 소년 운동, 여성 운동은 활동이 미약했으며, 여성 교육에는 개신교와 안식일교회의 역할이 컸다.
[교육자]
고창 지역 교육자를 논할 때 으레 등장하는 사람이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이라는 일본 사람이다. 마스도미 야스자에몬[枡富安左衛門]은 고창고등학교 설립자이다. 그러나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에 대한 일반적인 긍정의 평가나 일간지 보도와 달리 그가 소유한 농장은 쟁의 다발 지역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비밀 요원이자, 일제 식민 정책 수행을 위해 파견된 ‘선발대’의 일원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연보’를 참고할 때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이를 간과한 채 고창 지역 교육 부분의 지대한 공로자로만 부각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고창고등보통학교 이사로 활동했던 홍종철(洪鍾轍) 또한 강대식(姜大湜)·이휴열(李休烈)·신용식·오균성과 함께 학교의 부채를 갚는 등 학교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되나, 조선총독부의 자문 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로 활동했던 고창 지역의 대표적 친일 분자였다. 홍종철이 소유한 땅의 일부는 마스도미 야스자에몬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이를 계기로 그는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의 권력까지도 승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또 히로히토 일본 천황의 부름을 받고 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일제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은 친일파였다.
이에 반해 강대식은 성송공립보통학교뿐만 아니라 고창고등보통학교의 설립과 유지에 공이 컸으며, 양태승은 고창고등보통학교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평가된다. 일제 강점기 북한의 오산고등보통학교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고창고등보통학교는 민족 사학을 대표하는 명문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강대식·양태승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 기관 및 교육 활동]
고창 지역 교육 기관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사립에서 출발하여 공립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이것은 사립학교를 공립학교로 전환시키고자 했던 일제의 식민 교육 정책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에서는 노동 야학과 여성 야학, 서당 등이 인근 지역인 정읍과 부안 지역과 비교해 볼 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고창 지역 주민들의 높은 교육열을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일제는 공립보통학교의 부족을 보충하고 서당의 수구성을 이용하겠다는 생각에서 처음에는 서당에 대한 규제를 가하지 않았다. 이에 식민지 교육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자제는 물론이고 학자금이 곤궁한 빈곤 가정의 자녀들이 서당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서당 자체는 어디까지나 전근대적 사숙이며, 교재나 교원에서도 근대 학교와 커다란 차이가 있어 그 역할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서당은 각종 강습소와 노동 야학, 농민 야학 등과 함께 근대적 학교 체제의 틀 밖에서 지역에 뿌리를 둔 자립적인 민간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1925년 고창 지역에는 63개의 서당에서 538명의 학생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야학은 사립학교 규모에 해당하는 인원을 수용하면서 한글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에는 1924년과 버금가는 한해 피해를 입어 도작이 3만 석, 전곡이 전해에 비해 30%가 감소될 것으로 예측되는 가운데서도 1928년 5월 기부금을 모집하여 고창벽신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으며, 고창청년동맹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또한 같은 해 고창사회단체협의회가 조직되었으며, 고창소년동맹이 창립되었고, 한편으로는 문맹 퇴치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면 사상 단체가 활발해지는 대신 사회 운동이 위축되는 경향이 있으나 고창 지역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이는 교육과 사회 운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고창 지역민들의 민족 운동으로 평가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특히, 고창고등보통학교는 전국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군민 학교’로서 고창군민들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의의와 평가]
그런데 이러한 각종 사회 운동이 신간회 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또한 고창군민들의 교육에 대한 높은 관심과 열정이 있었음에도 민립 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의문이자 이 지역이 갖는 한계라 할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초 청년 운동에 가담했던 고창 지역 유력자들이 처음에는 민족 운동에 가담했다가 뒤에는 도평의회원이나 중추원 참의가 되는 등 일제의 집요한 회유에 타협적인 인물로 변질되었다고 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는 부르주아 민족 운동자들이 처음과 달리 192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