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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746
한자 衡平運動
영어음역 Hyeongpyeong Undong
영어의미역 Social Equality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재영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전개된 백정들의 신분차별 철폐 운동.

[개설]

형평운동은 1923년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조직되어 1935년 대동사(大同社)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12년간 전개된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 운동이다. 형평사는 1923년 4월 25일 강상호(姜相鎬)의 제안으로 이학찬(李學贊)과 장지필(張志弼)이 주동이 되어 결성한 사회운동 단체였다. 형평사 문건에서는 1923년 당시 천업(賤業)에 종사하면서 차별 대우를 받고 있는 백정 신분의 사람들이 40만 명을 넘고 있었다고 했다.

형평사는 1923년부터 1934년까지 영남 지방 64개, 호서 지방 48개, 호남 지방 44개 등 전국에 약 200여 개의 지·분사를 설치하고 형평청년회·형평여성회·형평학우회·형평소년회 등의 외곽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 중 모체 운동인 형평운동을 돕기 위한 외곽 단체 중 가장 활발한 것이 형평청년회였다. 이밖에도 정행단(正行團), 광정단(光正團), 형평소년동락회(衡平少年同樂會), 금주동맹(禁酒同盟), 형평저축계(衡平貯蓄契), 동진사(同進社), 정위단(正衛團), 정진사(正進社), 자위부(自衛部), 형평사혁신회(衡平社革新會), 동인공제사(同人共濟社) 등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형평사 본부에서는 운동 초기부터 사원들의 인권 투쟁은 물론 형평 사원 자녀들의 입학을 권유하는 순회위원을 파견하고 사원 자녀 교육 지원 기금 조성, 형평학교 설립 추진, 신문·잡지 구독을 통한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형평운동은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 여성운동과 함께 민족운동의 한 부문으로 인식되고 평가된다. 그러나 1935년 대동사로 개칭되면서 이해관계가 동일한 자들의 친목 단체, 경제적 이익 단체로 전락하였다. 이에 따라 인권운동을 표방했던 형평운동의 본래 목적과 의미마저 변질되어 그 의의를 잃게 되면서 대동사는 해체되었다.

[고창 형평 분사 설립]

오랜 옛날부터 백정들은 거주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생활에서 갖은 차별을 당하며 살았다. 그들은 일반인들의 배척 때문에 성 밖의 일정 지역이나 농촌 마을의 외진 곳에서 많게는 수백 호에서 적게는 수십 호의 집단을 이루며 살았다. 고창 지역에서는 이들이 사는 지역을 하촌(下村)으로 불렀다.

고창 지역에 형평 분사가 조직된 것은 1923년 8월 4일이었다. 장날을 기해 고창군 부안면 중흥리에서 흥덕과 부안의 형평 분사 창립총회가 개최된 것이다. 당시 전북지사장 권두호(權斗浩)의 규칙 통과와 신인명(申仁明)의 취지 설명이 있은 후 임원 선거가 치루어져서 분사장에 조홍술(趙弘述), 총무에 김종수(金鍾守), 재무에 임준성(任俊成), 서기에 김종기(金鍾基)가 선임되었다.

[고창 형평 분사 활동 내용]

고창 지역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그 어느 곳보다 강력한 신분 투쟁을 전개한 지역이었다. 이는 손화중(孫化仲)이 전라우도에 있으면서 백정·재인·역부·대장장이·승려 등 천인들을 모아 별도로 한 접(接)을 만들었다고 하는 『오하기문(梧下記聞)』의 기록이 입증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고창 지역의 일반인들은 일찍부터 평등사상을 경험했을 것이며, 백정을 비롯한 천민들에 대한 인식이 다른 지역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이는 고창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백정들의 인권 운동이 활발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또한 전라북도에서 물화가 집산되는 곳을 군별로 살펴볼 때 고창은 생우(生牛)가 주요 품목 중의 하나로 취급되는 지역이었으므로 백정들의 경제 활동 또한 활발한 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창분사는 창립 기사만이 일간지에 눈에 띌 뿐, 이후 활동에 관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정읍이 인근 지역 분사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읍분사 창립총회에서 정읍분사장[장두원(張斗元)]과 고창분사장[김용진(金龍振)], 태인분사장[조학태(趙學泰)]이 동시에 선출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고창 지역의 경우, 백정들이 군내 하거리에 20여 명 정도가 살고 있었으나 마을을 형성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형평운동을 수행할 인적 자원의 부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형평 분사의 침체된 활동과 관련하여, 1927년 9월 30일 고창 지역 내 사회단체 협의회에서 형평운동에 관한 내용이 협의되었다. 이는 청년운동과 소년운동, 신간회 등 각 사회단체 간 유기적 연락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협의된 형평운동에 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형평운동은 주체 측의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신문 기사가 주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따라서 고창 지역에서 전개된 형평 운동을 소상하게 밝힐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이들이 전개한 운동 역시 봉건적 유제를 타파하고자 한 사회 개혁 운동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 활동의 적극성 여부를 떠나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를 부르짖었던 인권 운동이자 권익 신장 운동으로서도 충분한 가치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특히 고창 지역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개된 강력한 신분 투쟁과 연계시켜 볼 때 근대 지향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었다는 점에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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