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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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湖南興城倡義碑 |
영어음역 | Honam Heungseong Changuibi |
영어의미역 | Memorial Monument for Righteous Army in Honam Heung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돈 |
성격 | 기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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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38년 |
관련인물 | 채홍국|고덕붕|김영년(金永年)|한계상(韓繼常) |
재질 | 화강암|오석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동사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창의비.
[개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김영년(金永年), 한계상(韓繼常) 등 92명의 의사(義士)가 흥덕면 남당마을에서 혈맹창의(血盟倡義)하여 왜적과 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자 그 위업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창의비이다.
1593년(선조 26) 6월 29일 왜적에 의해 진주성이 함락된 뒤에, 왜적은 자신들의 숙원이던 전라도 점령에 성공하였고, 7월 5일에는 고부까지 침입하였지만, 이미 전세는 왜적이 전라도를 점령지화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이때 왜적이 퇴진하는 바람에 고부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흥덕고을은 아슬아슬하게 침략의 위기를 넘겼으나, 3년여의 화의가 결렬됨으로써, 왜적은 1597년(선조 30) 2월에 12만 명의 대병을 다시 투입,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에 3월 23일에 흥덕이 점령을 당하고 무장과 고창이 차례로 짓밟히고 선운사가 크게 병화를 입었다.
흥덕이 짓밟히던 날, 배풍산에서 의병장 채홍국 등 남당회맹(南塘会盟)의 100여 의열들이 300여 명의 장정을 이끌고 영암과 해남 의병들과 합세하여 2일간 크게 접전을 벌였다. 일단 퇴각했던 왜적과는 4월 14일 부안 호벌치에서 다시 격돌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고, 15일에는 흥덕 남당 장등원(長灯原)에서 1주일간의 혈전 끝에 모두 순절하였으며, 왜적도 마침내 정읍 방면으로 패주하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호벌치 전투와 장등원 전투로서, 그 기록과 전적들이 남아 있고, 흥덕에 호남흥성 창의비를 세워 당시의 호국 충정을 구국의 귀감으로 삼아 길이 전승하고 있다.
[건립경위]
고창 흥덕 의병 92명의 의사(義士)가 호벌치 전투와 장등원 전투에서 싸운 기록을 적어 기념하기 위해서 세웠다.
[위치]
흥덕제화 사거리에서 흥덕터미널로 직진을 하여 약 100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에 옥수장이 있는데, 바로 그 앞쪽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신비는 귀부와 이수의 경우 화강암을 사용하였고, 비신은 오석을 사용하였다. 귀부는 거북이를 조각하였고 이수는 여의주를 물려는 용을 두 마리 표현하였다. 1938년에 새운 비석은 좌대와 갓석을 사용하였고, 비신은 쑥돌을 사용하여 글자 판독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
[금석문]
호남흥성 창의비는 구비가 신비가 있다. 신비는 중앙에 있는데, 앞면의 글은 예서로 강암 송성룡이 썼으며, 거창 신사범이 지었다. 구비는 그 오른쪽에 있는데, 앞면 중앙에 ‘호남흥성창의비’라고 예서로 썼으며 바로 옆에는 의사 명단을 기록하였다.
비가 세워진 연도는 무인년이란 간지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938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왼쪽에는 의사들의 시를 모아 기록한 비석도 있으며, 동쪽에는 1986년에 창의비 내력을 적은 비가 있다.
[현황]
호남흥성 창의비와 관련된 유물로는 처음 창의를 했던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에 남당회맹단기적비가 있는데, 이 비를 세울 때 칼 여덟 자루와 구슬 갓끈 하나, 화살 70여 개가 발견되어 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또 바로 옆에는 순절한 선열을 봉안한 모충사가 있으며,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유정에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인 ‘호벌치전적지(胡伐峙戦蹟址)’가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들의 활동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주는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