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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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寬洙 |
영어음역 | Baek Gwansu |
이칭/별칭 | 근촌(芹村)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성미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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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889년 1월 28일 |
본관 | 수원 |
[정의]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본관은 수원(水原)이고, 호는 근촌(芹村)이다. 1889년 1월 28일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서 백도진(白道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백관수는 어려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도쿄[東京]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단장이 되었고, 학생 대표 11명 중 1인으로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2·8독립선언을 발표한 일로 1년간 복역하였다. 1924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취체역(取締役)이 되었으며, 1926년 12월부터는 편집인과 영업국장을 겸임했다.
한편, 1925년 5월 김준연(金俊淵)·안재홍(安在鴻)·백남훈(白南薰)·홍성하(洪性夏)·박찬희(朴瓚煕)·박승빈(朴勝彬)·최원순(崔元淳)·조정환(曺正煥)·최두선(崔斗善)·홍명희(洪命熹)·유억겸(兪億兼)·이긍종(李肯鍾)·이재간(李載侃)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만들어 민족 운동 조직을 육성하려고 노력했다.
백관수는 그 뒤에도 공산주의가 국내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조만식(曺晩植)·서상일(徐相日) 등이 모인 연정회(研政會)와 이상재(李商在)·신흥우(申興雨)·안재홍(安在鴻)·윤치호(尹致昊)·조병옥(趙炳玉) 등과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시도하였다. 1927년 2월 민족 단일당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자 조선일보사 대표로 참가했다. 1927년 7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제2회 태평양회의와 1929년 일본에서 열린 제3회 태평양회의에 민족 대표로 참석하였다.
1932년에는 홍문사(弘文社)를 설립하고 『동방평론(東方評論)』을 창간해 3년 동안 발행하였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다. 1937년 5월 동아일보사 제7대 사장에 취임했으며, 1940년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하자 이에 저항해 끝내 폐간 신고서[廢刊屆]에 날인하지 않아 11개월 동안 종로경찰서에서 구금되었다.
해방 후 원세훈(元世勳)·이인(李仁)·조병옥·나용균(羅容均)·곽상훈(郭尙勳)·김약수(金若水)·박찬희·김용무(金用茂)·박명환(朴明換)·신현모(申鉉謨)[일명 신윤국]·현동완(玄東完) 등과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을 발기했으며, 그 후 한국민주당에 합류해 총무가 되었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1948년 5·10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어 초대 법제사법위원장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을 지냈다. 6·25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