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9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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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成卿修 |
영어음역 | Seong Gyeongsu |
이칭/별칭 | 보현(輔賢),만취(晩翠)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정훈 |
성격 |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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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 |
성별 | 남 |
생년 | 1875년 5월 |
몰년 | 1941년 6월 |
본관 | 창녕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자는 보현(輔賢), 호는 만취(晩翠)이다. 1875년(고종 12) 5월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송산리에서 태어났다. 미산(眉山) 성부(成溥)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서영일이다.
[활동사항]
성경수(成卿修)는 어려서 가학(家學)을 계승하였다. 1890년(고종 27) 아버지의 뜻에 따라 기삼연(奇參衍)의 문하에 나아가 경서와 역사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읽고 성리학과 예학에 침잠(沈潛)했다. 사서(史書)를 배울 때 어진 왕을 위해 복절사의(伏節死義)[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도 꺼리지 않는 강직함을 말함]하는 대목이 나오면 무릎을 치면서 기뻐했다.
기우만(奇宇萬), 이승달, 조덕승(曺悳承) 등과 교유하며 봄과 가을에 강학을 열고 후진을 교육하며 시문을 짓고 지방의 풍속을 교화하였다. 1910년(순종 4) 나라가 망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오직 학문에 전념하였다. 1935년 환갑을 맞아서 잔치 비용으로 선대의 묘각을 지었다. 1941년 6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67세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만취유고(晩翠遺稿)』와 『만취당창수시록(晩翠堂唱酬詩錄)』이 있다.
[상훈과 추모]
흉년이 들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수십 석의 곡식을 내어 놓아 향민이 그 공적을 기리어 기적비를 세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