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9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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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枡富安左衛門 |
영어음역 | Maseudomi Yaseujaemon |
이칭/별칭 | 마스도미 야스자이몽[枡富安左衛門],승부장로(枡富長老),승부안재[枡富安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성미 |
[정의]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했던 일본인 종교가이자 교육자.
[개설]
마스도미 야스자에몬[枡富安左衛門]은 마스도미 야스자이몽, 또는 승부 장로(枡富長老)라 불리기도 한다. 1880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4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활동사항]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간장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두 형과 동생을 잃은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장을 경영하려고 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군에 징집되어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1906년에 군산에서 하가시노 아키코[東野昭子]와 결혼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아내로부터 감화를 받아 기독교 신자가 된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우에무라[植村正久]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신농정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이후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1909년 9월 전라북도 김제군 월촌면 월봉리에 땅 7백 정보를 매입하여 김제에서 살았다.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위해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김제와는 떨어진 고창군 부안면 오산리에 11정보의 땅을 개간하여 사과를 심고, 1912년 그곳에 하오산교회를 세웠다. 또한 흥덕학당을 설립하여 선교와 교육을 아울러 실시하였다.
이후 서울로 올라간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기호학당에서 공부하는 윤치병(尹恥炳)·양태승(梁泰承)·김영구(金永耉)를 만나 이들을 일본의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 유학시켰다. 마스도미 야스자에몬 자신도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이때 세 학생의 학비도 담당하였다.
하오산교회는 처음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이 설교를 했으나, 이후 황방연 전도사를 초빙하여 목회하게 하였다. 세 신학생이 졸업하고 귀국을 하자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윤치병을 하오산교회에서 목회하게 하고, 양태승은 흥덕학당을 책임지게 하였다. 또한 김영구는 학교 사감과 교회의 주일학교 교육을 맡겼다. 당시 고창군 각 지역에서 보통학교 3학년 과정을 마치면 흥덕학당으로 진급하여 소학교 과정을 마쳤으므로. 부안면 오산리는 작은 지역이지만 자연히 앞선 지역이 되었다.
1919년 4월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진학시키기 위해 오산학교를 설립하였다. 호남 지방에서는 최초의 사립 중등 교육 기관이었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고창의 하오산학교’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후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운영하고 있던 오산사과농장의 이익금을 모두 하오산교회와 오산학교를 위해 투자하였다. 또한 성서 교육을 위해 『성서연찬』이란 월간지를 간행하였다. 당시 시골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업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오산학교를 개인의 힘으로는 더 이상 경영할 수 없게 되자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고창군민과 함께 학교를 키우고 발전시키기로 작정하였다. 1922년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심혈을 기울여 이끌어 오던 오산학교를 고창군민에게 기증하였고, 이에 고창군민들은 힘을 뭉쳐 이를 인수한 뒤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1925년 고창고등보통학교가 군청소재지인 고창읍으로 옮겨져 개교할 때는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와서 축하하였다.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은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고통고등보통학교를 전국 최고의 학교로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34년 11월 6일 5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는데, 일본인이면서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을 사랑하다 간 마스도미 야스자에몬의 장례식이 열렸던 고창고등보통학교 운동장은 그의 유덕을 기리는 학생과 군민의 오열로 가득 찼었다고 한다. 하오산교회는 뒤에 오산교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은 중흥리로 옮겨 크고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