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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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鼎鎬 |
영어음역 | Jeongho |
이칭/별칭 | 한영(漢永),영호(映湖),석전(石顚),석전산인(石顚山人)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배옥영 |
[정의]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성은 박씨(朴氏)이다. 자는 한영(漢永), 호는 영호(映湖)·석전(石顚)이다. 석전산인(石顚山人)이라고도 불렸다. 1870년(고종 7) 8월 18일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초포면 조사리에서 태어났다. 정호(鼎鎬)는 나라 안팎으로 어렵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살았으나, 학문은 물론이고 교(敎)와 선(禪)에 정통하고 원융적(圓融的) 실천(實踐)의 화엄사상(華嚴思想)을 불교적 이상으로 전진하였다. 금봉(錦峯)·진응(震應)과 함께 근대 불교사의 3대 강백(講伯)으로 추앙 받고 있다.
[활동사항]
정호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어린 형제들과 고향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17세 되던 해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에서 금산화상(錦山和尙)의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 법문을 듣고 전해 주었는데, 이것에 크게 감동하여 1888년 전주 태조암(太祖庵)으로 출가하였고, 금산화상의 법제자가 되어 법호를 정호라 하였다.
1890년 장성 백양사 운문암의 환응(幻應)에게 4교(四敎)[『능엄경(楞嚴經)』, 『금강경(金剛經)』, 『반야경(般若經)』, 『원각경(圓覺經)』]를 사사 받고, 1892년 순천 선암사 주지 경운(擎雲)에게서 대교(大敎)를 배웠다. 1894년 안변 석왕사를 비롯하여 신계사와 건봉사에서 안거하였으며, 이어 1895년에는 순창군 구암사에서 처명(處明)의 법을 이어 당호를 영호라 하였다.
석전 또는 석전산인이란 시호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일찍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승려 백파(白坡)에게 ‘석전(石顚)’, ‘만암(曼庵)’, ‘구연(龜淵)’이란 글씨를 써 주면서, “훗날 법호 가운데 도리를 깨친 자가 있으며 이로써 호를 삼으라.”고 한 것이 승려 처명에게 유전되었다가 정호에게 와서 그 이름이 전수된 것이라고 전해진다.
1896년 정호는 구암사에 이어 해인사·법주사·백양사·화엄사·범어사 등지를 다니면서 법회를 크게 펼쳐 불경을 강의하였다. 또한 30세 되던 해부터 산청의 대원사, 장성의 백양사, 해남의 대흥사, 합천의 해인사, 보은의 법주사, 구례의 화엄사, 안변의 석왕사, 동래의 범어사 등에서 대법회를 열어 그때마다 청중들의 가슴 속에 돈독한 불심을 심었다.
1908년 정호는 서울에 올라와 불교 개혁 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1910년 일제가 조선 강점의 마수를 드러내자, 이 기회를 틈타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우리나라 불교와의 연합을 꾀하여, 연합맹약 7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정호는 한용운(韓龍雲)·성월(惺月)·진응·금봉 등과 함께 반대하여 한국의 불교 전통은 임제종(臨濟宗)임을 밝혀 연합 조약을 무효화시키고, 일제의 한국 불교 말살 정책에 정면으로 맞섰다.
1912년 정호는 중앙불교전문학교[현 동국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 이듬해인 1913년에는 『해동불보(海東佛報)』를 창간하여 불교 유신을 주장하고 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하였다. 1914년 고등불교강숙(高等佛敎講塾)에서 강의를 했다. 1916년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이 설립되자 후학을 지도하였다. 1926년 서울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 대원암에 선불장(禪佛場)을 개설한 이후 20여 년간 청담(靑潭)을 비롯하여 신석정(辛夕汀)·조지훈(趙芝薰)·김달진(金達鎭)·김어수(金魚水) 등 불교계의 지도적 영재를 배출하였다. 당시 가까이 사귄 명사로는 최남선(崔南善), 정인보(鄭寅普), 변영로(卞榮魯), 홍명희(洪命熹), 오세창(吳世昌), 권동진(權東鎭), 김경희(金敬熙), 안종원, 민형식, 윤희구, 여귀형 등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특히 한용운과 각별하게 지냈다. 1929년 조선불교 교정(敎正)에 취임하여 종단을 이끌었으며, 1931년 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 선임되었다. 광복 이후 조선불교중앙총무원회의 초대 교정으로 선출되어 불교계를 이끌었다.
1948년 2월 29일 해질 무렵 정읍 내장사에 아무 기별 없이 불쑥 나타난 정호는 반갑게 맞이해 주는 주지에게 “나 여기서 죽으려고 왔다.”며 천진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윽고 입적을 하니, 세속 나이 79세, 법랍 61세였다. 법맥은 상언(尙彦)-긍선(亘琁)-설두(雪竇)-설유(雪乳)-정호로 이어지며, 대표적인 제자는 성원(姓元), 순호(淳浩), 용하(龍夏), 승희(昇熙), 남곡(南谷), 경운(景雲) 등이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석전시초(石顚詩抄)』, 『석림수필(石林隨筆)』, 『석림초(石林抄)』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선운사 부도전에 사리탑이 있고, 성균관대학교 교수 성낙훈(成樂薰)이 찬한 부도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