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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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鼎山祠 |
영어음역 | Jeongsansa |
영어의미역 | Jeongsan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범호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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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1797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 |
소유자 | 창녕조씨 종중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에 있는 조서(曺庶), 조의기(曺義起), 조언징(曺彦徵)을 향사하는 조선 후기 사당.
[개설]
정산사는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사우(祠宇)로, 조선 전기의 문신인 조서(曺庶)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조의기(曺義起), 조선 후기의 효자 조언징(曺彦徵)을 향사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서의 자는 여중(汝衆), 호는 청간(淸澗)이고, 본관은 창녕으로 경기도 부천군 계산리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후기에 진사가 되었고, 1392년(태조 1)에 문과에 올라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예조참의(禮曹參議), 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394년(태조 3)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도해(圖解)와 주(註) 등을 붙여 간행하였다.
태종 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물(貢物)의 경감(輕減)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으나 명나라 태조의 미움을 사서 금치위(金齒衛)의 군졸로 6년여 동안 유배되었다. 환국할 때 명제(明帝)가 하사한 은장식의 도핵배(桃核盃)는 지금도 보존되어 향사(享祀)에 헌작(獻爵)한다.
조의기의 자는 의보(宜甫), 호는 가돈재(嘉遯齋)이고, 조서의 9세손 조덕창(曺德昌)의 아들로, 1617년(광해군 9)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가정지학(家庭之學)을 익혀 말과 행동을 예로써 하고 일거수일투족이 정(正)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학문은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형제 세 명이 아침저녁으로 서로 만나서 부모 봉양에 힘썼다. 고을 유림들과 모양청금안(牟陽靑衿案)을 창설하고 향약을 두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만년에 방장산 두우봉 기슭에 정사(精舍)를 지어 가둔재라고 편액하고 독서와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조언징의 자는 휴백(休伯), 호는 삼오당(三吾堂)이고, 조서의 10세손으로 1684년(숙종 10)에 출생하였다. 천성이 효우(孝友)하여 3세에 백부(伯父)에게 양자로 가서 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고, 상을 당하여는 예에 어긋남 없이 하였다. 항상 인서인묵(仁恕忍默) 4자를 좌우명으로 삼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앞장섰다. 형제 셋이 한집에서 우애하고 살아 삼오(三吾)라 칭하자 이를 자호(自號)로 삼았다.
[위치]
정산사는 월산마을에서 검암마을로 들어가는 마을 앞에서 동쪽 길가에 있다.
[변천]
1797년(정조 21)에 창건하여 유창(劉敞), 유한량(劉漢良), 조서를 향사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가 1900년(고종 37)에 다시 단을 세웠다. 1976년에 중건하면서 유창과 유한량은 조산사를 세워 따로 배향하였고, 조의기와 조언징을 추배하였다.
[형태]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며, 강당, 명덕재(明德齋), 내삼문, 장서고(藏書庫), 수직사(守直舍)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향사일은 음력 9월 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