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2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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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築 |
영어음역 | Geonchuk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
집필자 | 이숙희 |
[정의]
전라북도 고창 지역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구조물.
[개설]
건축은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쉼터와 안락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종교 등 다양한 인간 활동을 위한 유용한 공간도 제공한다. 건축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주거 건축, 종교 건축, 관청 건축, 휴양 건축, 복지와 교육 건축, 상업과 공업 건축 등으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각 영역별 건축의 특색은 주로 역사 문화적인 조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고창군에는 향교, 고택, 누정 등의 역사적인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향교]
향교는 유교 문화 위에서 설립 운영된 교육기관으로서, 국가가 유교 문화 이념을 수용하기 위해 중앙의 성균관과 연계시키면서 지방에 세운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향교의 설치를 통해 유학 교육의 기회를 넓혔고, 향교는 더 나아가 문화적·정치적 기능이 강화되어 또 다른 성격을 구현하는 기구로 변화되었다. 지방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향교가 오늘날 지역 교육의 본보기로 남는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1. 고창향교
고창읍 교촌리 248-1번지[향교길 27-3]에 있는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를 옮겨 온 것이다. 1512년(중종 7)에 창건되었고, 1580년(선조 22)에 중건되었다. 그 후 순종 때 현재의 대성전과 명륜당을 중수하였다.
2. 무장향교
고창군 무장면 교흥리 19번지에 있는 무장향교는 1420년(세종 2)에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중건하였다. 2010년 현재 향교 내에는 대성전과 함께 4동의 건물이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무장향교 대성전은 197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로 효친 사상과 미풍양속의 전통 문화 계승을 위해 2006년 9월 7일부터 기로연 행사를 재현하였다.
3. 흥덕향교
고창군 흥덕면 교운리 126번지에 있는 흥덕향교는 1406년(태종 6) 흥덕현[현 흥덕면] 남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목화정(木花亭) 부근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21년(광해군 13)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명륜당 자리는 원래 갈산사 자리였는데 갈산사가 폐치되자 향교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유림들의 숙원으로 1675년(숙종 1)에 어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고택]
1. 황윤석 생가
조선 후기 실학자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의 생가로, 고창군 민속자료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359번지[조동길 35-2]에 있는 황윤석 생가는 황윤석의 선친인 황전이 건립한 것으로,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가 남아 있다. 안채는 높은 축대 위에 세웠는데, 정면 6칸이고, 앞뒤에 툇간을 둔 5량가의 일자형 초가로 전형적인 남부 지방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벽체는 안방에서 중방 사이를 모두 판벽(板璧)으로 하였고, 중방에서 하방 사이는 솟을동자를 세운 머름청판으로 꾸미는 등 격식을 갖추었다.
정면에서 볼 때 동쪽 맨 끝 칸은 마루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방 한 칸, 대청 두 칸, 부엌 한 칸의 순서이다. 대청 북쪽 벽 위에 평해황씨 선조의 위패를 둔 곳이 있다. 원래 안채 뒤편에 사당(祠堂)이 있었으나 터만 남아 있고, 사랑채와 문간채는 소실되었던 것을 1909년에 다시 지었다.
2, 김정회 고가[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9호]
고창군 고창읍 도산리 610-2번지에 있는 김정회 고가는 1862년(철종 13)경에 지어진 것으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상류 계층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로 안채·사랑채·행랑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간채·사당·안채를 중심으로 2동의 큰 곳간돌이 자연석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용마루를 얹은 팔작지붕의 남향 건물로, 나중에 동·서쪽에 각각 1칸씩을 덧붙였다. 주초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며, 기둥은 두리기둥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만수당(晩睡堂)’이라고 쓴 편액이 있다. 기단의 네 모퉁이에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수를 받기 위한 돌확이 놓여 있다.
정문이 잠겨 있는 상태로, 동쪽 담장이 허물어져 있다. 조선 후기에 지은 전형적인 상류 계층의 가옥 형태를 볼 수 있으며, 이중 용마루를 가진 팔작지붕, 홑처마, 그리고 안마당보다 높이 자리 잡고 있는 안채의 가옥 양식이 일반적인 고가와 비교했을 때 색다르게 보인다.
3. 인촌 선생 생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인촌 선생 생가는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435번지에 있다. 인촌 선생 생가는 교육자이자 사업가, 정치가였던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와 김연수(金秊洙) 형제가 태어나고 성장한 장소이다. 낮은 담을 경계로 안쪽에 큰댁, 대문 쪽에 작은댁이 있는데, 큰댁 안채는 1861년 11월 13일, 동쪽 사랑채는 1879년 6월 7일, 작은댁 안채는 1881년 10월 9일에 김성수의 할아버지 김요협이 건립하였다.
대지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낮은 담을 경계로 북쪽에 큰집, 남쪽에 작은집이 세워져 있다. 인촌 선생 생가는 마을 사람에게 위탁, 보존해 오다가 1977년 8월 김연수가 자비를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하면서 없어진 건물을 복원하였다. 하나의 대지 안에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두 집을 함께 지은 점이 특이하다. 현재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상당한 규모를 갖춘 인촌 선생 생가는 당시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환경을 보여 준다.
4. 백관수 고택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된 백관수 고택은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44번지[도덕길 58]에 있다. 현재 건물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팔작지붕 건물이다. 부엌 옆으로 2칸의 방이 있고, 옆으로 건넌방이 있으며, 그 앞에 마루방이 있는 구조이다. 남부 지방의 민가들은 보통 부엌, 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구성되지만, 백관수 고택은 방의 수를 늘려 겹집과 같이 건넌방 앞면에 마루방을 만든 것이 독특하다.
안채 북서쪽으로 백관수 기념석이 설치되어 있고, 북쪽 야산에는 최근 지은 사당이 있다. 본래 초가였으나 새마을 사업 당시 시멘트 기와로 지붕을 개수하였으나 다시 초가로 복원하였다. 백관수 고택은 대문채와 사랑채를 한 동으로 처리하며 공간을 나누어 각 채의 평면 형태에서 당시 건축의 일반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5. 정휴탁 고가
고창군 성송면 하고리 437-1번지[삼태길 18]에 있는 정휴탁 고가는 안채, 사랑채 및 곳간채 등 3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휴탁(鄭休鐸)이 관직에서 물러 나와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건립한 것이다. 원래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구조가 바뀌어 현재는 건물 4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주초(柱礎)는 자연석을 이용한 덤벙주초이고, 기둥은 두리기둥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안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고, 안채 왼쪽에 있는 건물은 행랑채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데, 함석지붕으로 보수하였다. 대문은 남향으로 5칸 솟을대문이며, ‘노포당(老圃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반적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5칸짜리 솟을대문의 크기만으로도 당시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고, 조선 시대 반가(班家)의 건축 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6. 강대식 고택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317번지[암치2길 17]에 있는 강대식 고가는 근대 개항기 승지를 지냈던 강대식의 생가이다. 그의 아버지 만포(晩圃) 강연수(姜淵秀)가 지었다. 원래 1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안채 1채와 대문간만 남아 있다. 7칸의 모퇴겹집으로, 가운데 기둥 네 개는 덤벙주초에 두리기둥이고, 나머지 바깥쪽 기둥은 네모기둥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다. 건물의 규모는 99㎡ 정도 된다. 왼쪽에 난간이 있는 방은 앞쪽에 아궁이가 있고, 가운데 3칸은 툇마루가 있다.
대문은 5칸 솟을대문이며,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기와가 그대로 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황토와 돌을 쌓아 기와를 얹은 담장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 거주인은 종부와 종손으로, 오래된 기와지붕은 관리가 쉽지 않은데다 보수나 교체를 해 줄 기술자도 찾기 어려워서 5년 전인 2004년 금속 기와로 교체했다. 민간의 전통 가옥으로 구조면에서 다양한 건축미를 자랑하고 있다.
7. 정세환 가옥
고창군 대산면 율촌리 174번지[율촌길 77-1]에 위치해 있는 정세환 가옥은, 3대와 4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세환(鄭世煥)의 가옥으로 1934년에 지어졌다. 안채는 일자형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인데, 처마 끝부분을 양철로 덧대어 놓았다. 내부는 가운데 6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다. 현재 안채 1동과 뒤편에 전각 2채가 남아 있다. 고창의 자산가로 알려진 정세환 가옥의 규모를 통해 전라도 지역 부호의 생활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을 열고 닫음으로써 상황에 따라 내실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융통성과 이중문 구조 같은 변화 등에서 근대 한옥의 다양한 면을 엿볼 수 있다.
8. 고창 신재효 고택
중요민속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된 고창 신재효 고택은 고창읍 읍내리 446번지[판소리길 7-3]에 자리 잡고 있다. 신재효가 여생을 마친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한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아들이 1899년(광무 3)에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고창 신재효 고택은 국권 상실 이후 중요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고창경찰서 관사로 이용되었다. 이때 지붕이 함석으로 개조되고, 이용에 편리하도록 건물의 구조가 개조되거나 첨삭되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원래는 멀리서 물을 끌어들여 마루 하부를 통해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해 매우 운치 있는 건물이었다. 앞쪽에는 비교적 큰 두 그루의 나무가 있는 정원이 펼쳐져 있다. 또 건물 오른쪽에는 네모꼴의 연못이 있고 왼쪽 뒤편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건물 구조는 외벌 대막돌 긴단 위에 막돌 덤벙초석을 놓고 앞쪽의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으로,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3량가이다. 부엌 벽은 심벽으로 처리하고 부엌과 온돌방 사이의 개구부에 비교적 너비가 넓은 쌍여닫이 출입문을 설치한 것이 특이하며, 대청의 양쪽 벽에 방과 연결되는 출입문을 내지 않은 것이 이채롭다.
9. 김소희 생가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 335번지[김소희길 33]에 위치하고 있는 김소희 생가는 마을 주민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축하여 관리하던 것을 헐고 2002년 5월에 주민들의 기억과 고증을 토대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ㄱ자 형태의 초가지붕을 얹은 민가로, 온돌방 3칸과 부엌 1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와 지푸라기를 짓이겨 바람벽을 만들었고, 댓살로 문과 창문을 엮었다.
안방 문 위에 김소희의 사진과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뒤뜰에 장독대와 우물이 남아 있으며 헛간도 한 채 있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하여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판소리 명창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는 곳으로, 동리 신재효 생가, 고창판소리박물관, 동리국악당과 더불어 고창 지역을 대표하는 판소리 관광지 명소이다.
[강학당]
강학당은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개인이 건축한 건축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학당의 존재는 지역 교육의 보다 적극적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1. 김기서 강학당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00호로 지정된 김기서 강학당은 고창군 아산면 상평리 산9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1548년(명종 3)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기서 강학당 자리는 원래 전불사(典佛寺)의 불당지라고 전한다. 김기서는 광산인(光山人)으로, 자(字)는 시견(時見), 호는 돈목재(敦睦齋)로 조광조의 제자이다.
앞면 길이 12.2m, 측면 길이 4.7m, 기둥 높이 2.37m이며, 정면 5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베개마루 대청에 중당(中堂) 2칸, 좌협실(左挾室) 2칸, 우협실(右挾室) 1칸으로 이루어졌으며, 앞면 퇴(退)는 150㎝ 폭으로, 중후한 공청(公廳)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이다. 또한 소박한 모습의 조선 전기 건물이다.
2. 흥동 장학당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된 흥동 장학당은 고창군 성내면 양계리 458-7번지[시기1길 56-5]에 자리 잡고 있다. 1931년 백낙윤(白樂允), 이순열(李舜烈), 이석열(李錫烈), 황상익(黃尙翼), 백관수(白寬洙), 이휴열(李休烈), 이갑수(李甲洙), 황서구(黃瑞九) 등 98명의 지역 유지들이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낼 독립군 자금 모집과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흥동 장학계를 조직한 뒤 지은 건물이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목조기와 건물로, 4단이나 되는 기단을 쌓았고, 둥근 주초 위에 원주를 사용했다. 팔작지붕에 조선식 전통 기와를 얹었으며, 앞면의 문짝은 새살문이고 뒷면에는 판문을 달았다. 벽체는 회벽으로 마감되어 있다. 대들보는 납도리와 함께 나타나는데, 원형 대들보이면서 밖으로 나온 보아지는 방형으로 다듬어져 처리되었다.
흥동 장학당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은 대청 전면의 띠살문에 있는 소비창살의 아름다운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 가옥에서는 대체적으로 우물정자 창살을 사용하는데, 이곳에서는 궁궐이나 사찰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소비창살을 설치하여 가옥의 품격을 더해 주고 있다. 밖에서 보는 소비창살은 오각형이지만 안에서 보는 소비창살은 마름모형이어서 달빛이 찾아 드는 마름모 창살의 아름다움을 상상하면 참으로 고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대청마루는 이 건물의 중심으로서 양쪽에 동재와 서재 형식의 방을 두고 있다. 건물 앞의 마루는 대청마루로 이어지는 또 다른 공간으로서, 대청마루에 올라오지 못하는 신분을 가진 아이들도 경청할 수 있도록 배려한 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건물의 중심은 뒤에 있어서 앞 처마는 뒤 처마보다 길게 나와 있는 전형적인 남쪽 지방의 건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건물의 측면에서는 주로 양반가 가옥에서나 볼 수 있는 마름청판이 나타나고, 우미량은 자연 모습 그대로를 살려 사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어처구니는 진해철을 사용하였고, 합각도 해학스럽게 처리하여 건물의 다정함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건물 정면에 보이는 현판의 ‘장학당’은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의 글씨이다.
[모정]
모정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지어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휴식을 취하거나 즐기기 위한 공간 건축이다. 주로 마을의 입구, 즉 동구 밖이나 당산나무 옆에 자리 잡고 마을의 역사와 함께한다. 모정은 논농사가 많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이용하는 사람들 역시 농민들로서 서로 나누는 화제도 매우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고창 지역의 모정은 과거에도 많았지만 지금은 더욱 많아 거의 소단위 마을마다 하나씩 있어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래된 모정은 그다지 많지 않고 상당수가 지붕을 색깔 있는 강판으로 교체하였다. 공음면 선동리 모정처럼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오래된 모정이 낡아 헐어 버리고 새롭게 모정을 지은 경우가 많다. 간혹 우평리 독실마을이나 신림면 가평리 고색창연마을의 모정처럼 처음에 지은 모정과 후대에 새로 지은 모정이 공존하기도 한다.
농업의 기계화로 예전처럼 농부들이 모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경우는 드물어졌지만 농촌 인구의 감소와 노령화로 마을의 노인들이 한가롭게 담소를 하는 장소가 되었다. 남녀노소의 구분이 엄격하던 시기에는 여성들은 모정을 쉼터로 이용하지는 못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할머니들 차지가 되었다고 한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겨울철에는 마을회관을 이용하기 때문에 비닐로 씌워 두거나 텅 빈 모정에 시래기나 나물 종류를 널어 말리기도 한다.
[누정]
기능과 주변 경치에 따라 누각(樓閣)·정자·재(齋)·정사(精舍)·대(臺)·당(堂)으로도 불리는 누정과 누정의 정원은 한국 건축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누정이란 강학(講學)을 비롯하여 소요(逍遙)·음풍(吟諷)·은둔 등의 공간으로 수백 년의 세월을 온 몸으로 껴안은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고즈넉한 맛을 풍긴다. 이러한 문화적 공간은 조선시대 건축의 미와 공간 활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1. 취석정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된 취석정은 노계(蘆溪) 김경희(金景熹)가 1546년(명종 1) 건립한 것으로, 고창읍 화산리 249번지[노동로 191-9]에 있다. 김경희는 1534년(중종 29)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나, 명종 즉위년에 있었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중종이 중국의 유명한 시인 두보의 시 한 수를 친히 써서 김경희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취석정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술에 취하면 집 앞에 있는 돌 위에서 잠들었다는 고사에서 따온 말이다. 나지막한 기초 위에 자연석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난간은 기둥 선에 맞추어 계자각을 세우고 난간두겁대만 기둥 밖으로 돌출시켰다. 담장 안에는 아직 훼손되지 않은 지석묘 7기가 있고, 담장 밖으로도 3기의 지석묘가 있어 옛 선사 유적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또한 팔작지붕에 우물마루가 있는 취석정은 정자 가운데를 온돌방으로 꾸민 독특한 양식의 건물로 조선 시대 정자 문화의 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2. 석탄정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6호로 지정된 석탄정은 석탄(石灘) 유운(柳澐)이 낙향하여 학문을 강의하기 위해 1581년(선조 14) 세운 정자로, 고창읍 율계리 341번지[고창천길 174-10]에 자리 잡고 있다. 유운은 한양에서 이곳으로 내려와 석탄정을 세우고 동쪽과 서쪽에 상풍란(爽風欄)·영월헌(迎月軒)이란 현판을 걸고 뜰에는 반송을 심은 뒤, 정자에서 좀 떨어진 앞 냇가에는 낚시터를 만들어서 향사우(鄕士友)와 더불어 풍월을 읊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석탄정은 석탄 앞 들 가운데 논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멀리까지 잘 보이며, 아름드리나무들이 빙 둘러 서 있어 지난 세월을 말해 주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며, 자연석 덤벙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도리 밑에는 장혀를 받혔으며, 홑처마로 마무리하였다. 정자 가운데에 방이 있고, 뒤쪽에 창고로 쓰이는 작은 다락이 있다.
석탄정은 당시 문장가들이 일생에 한번 와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유명한 정자였다. 지금도 당시의 판서 서헌순(徐憲淳), 좨주[祭酒] 송병선(宋秉璿)의 기문, 심석(心石) 송병순(宋秉珣), 간재(艮齋) 전우(田愚)가 지은 시가 있고, 옆으로는 수찬 창산(昌山) 조석원(曺錫元)이 지은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정자 주변의 노송과 고목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조선 전기의 강학과 휴식을 위한 대표적인 정자 양식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근대 건축물]
1. 고창 조양식당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325호로 지정된 조양식당은 고창읍 읍내리 216-2번지에 있다. 1935년에 건축되어 조양관이라는 일본식 여관으로 시작하여 해방 이후 국일관이란 요리집으로 변하였다. 이후 6·25전쟁이 끝날 무렵 최계월이 국일관을 인수하여 조양식당 문을 열었고, 현재는 그의 아들 성창섭이 한정식집의 명맥을 이어 오고 있다.
조양식당은 고창읍에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 중 유일한 일식 건물로서 주거 시설로서는 보기 드문 가치를 갖는 건물이다.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은 2층 박공지붕 건물로, 2층의 외벽은 목재 비늘 판벽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합각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있으나 내림마루가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처마, 서까래 등에서 일식 목조 주택의 수법이 잘 나타나 있다.
전라북도 등록문화재 제176호로 지정되어 있는 구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은 고창군 고창읍 교촌리 246번지[모양성로 50]에 있다. 1938년에 고창고등보통학교 강당으로 건립되어 무대와 홀의 공간 변용 없이 현재까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근대 학교 건축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고, 일제 강점기 지방 교육 시설 연구와 교육사적 자료로 가치 있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