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8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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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西-高敞-文化 |
영어의미역 | Across East and West, Gochang's Pansori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영일 |
[개설]
고창 지역이 판소리사에서 매우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창은 전라도 지역의 보성, 남원, 구례, 순창, 전주, 광주 등과 같이 판소리사에서 주요하게 거론되는 기라성 같은 지역들과 나란히 놓았을 때 절대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판소리의 역사가 부여하는 특수한 의미 속에서 의연하게 판소리의 고향이자 성지로서 우뚝 서 있다.
이것은 김수영(金壽永)·김창록(金昌祿)·김찬업(金贊業)·진채선(陳彩仙)·김토산(金土山)·김성수(金性洙)·김여란(金如蘭)·김소희(金素姬) 등 유수한 명창들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고창의 판소리에서 큰 획을 그었던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를 배출한 고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신재효의 문하에서 김창록과 진채선 외에도 박만순(朴萬順)·이날치(李捺致)·김세종(金世宗)·정창업(丁昌業) 등 유수한 명창들이 배움을 얻어 갔으며, 허금파(許錦波) 등이 활동했으니, 결코 판소리의 성지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서 신재효는 지금의 고창 지역을 판소리의 성지로 만든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주지하다시피 판소리의 탄생과 발전은 조선 후기라는 역사적인 시기에 봉건 양반 사회로부터의 탈영토화와 재영토화 사이의 역사적 힘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발전을 거듭하면서 전 국민적인 예술이 되었다. 그 기원 역시 ‘설화 기원설’, ‘서사무가 기원설’, ‘광대 소학지희 기원설’, ‘육자배기토리 기원설’, ‘판놀음 기원설’, ‘산이 기원설’ 등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처럼, 설화·무가·소학지희·육자배기·판놀음·강창 문학과, 여기에 더하여 가사·가곡·시조 등의 성악 예술 등 매우 다양한 기존 장르 요소들의 총화·정화로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취하고 있다.
판소리 연구의 또 하나의 특수한 난점은 판소리가 전승 방식에서 리좀(rhizome)[근경(根莖)]적인 전승과 발전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리좀이란, 하나의 뿌리로 귀착되는 나뭇가지의 구조[수목 구조]와는 달리, 이런저런 줄기들이 어떤 중심 뿌리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상(狀)을 말한다. 이는 광대들이 한 곳에 머물기보다는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소리 품을 팔아 온 연행 행태나,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훌륭한 스승을 찾아 길을 나섰던 관행에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누구누구의 훌륭한 명창이 이 지역 출신’이라는 것이 큰 문화적 의미를 갖기는 어렵다. 많은 명창이 어떤 지역 출신이기는 하되 그 지역과는 별 연관성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판소리의 전체 지형도에서 고창이 어떤 특수한 맥락을 가지고 있으며, 판소리사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했고, 또 어떠한 문화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앞으로 판소리의 발전 방향은 무엇이냐는 점이다. 즉, 지연에 얽매이기보다는 전체적인 판소리의 총체적 의미 속에서 지역 판소리의 특수한 문화적 의미를 살피고, 또 지역의 판소리 문화가 어떻게 전체적인 판소리사에 기여하고 있는지 그 문화적 맥락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역 판소리의 문화적 업적과 의미를 명확하게 짚어 낼 수 있고, 그 발전 방향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전제 속에서 고창 지역을 중심으로 한 판소리의 특수한 문화적 의미를 고찰할 생각이다. 이를 통해 고창 지역이 전체 판소리사에서 어떤 문화적 윤곽을 남기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한층 명확해질 것이다.
[고창 판소리의 문화적 배경]
고창 지역을 찾는 방문객들이 고창의 판소리를 둘러보고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고창이 “서편에 속하느냐, 동편에 속하느냐?”는 것인데, 대부분 딱 부러지는 대답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질문은 가장 답변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다. 왜냐하면 판소리의 창제[유파]를 구분 짓는 데는 동편·서편의 2대 분류나 동편·서편·중고의 3대 분류 등이 쓰이는데, 이 중 동편-서편이 하나의 이항 대립쌍으로 판소리라는 거대한 신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 동편과 서편은 판소리가 고산준령을 형성하던 시기에 소리 법제의 미학적 표준이 되었던 것이지, 이것으로 지역을 나누는 기준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동편과 서편은 판소리의 발전사에서 당대의 문화적 기호에 맞게 발전하여 미학적 표준이 된 역사적 산물이지 동시대의 평면적 대립물이 아니다. 동편제는 풍부한 성량으로 소리에 기교와 수식 없이 통성으로 장단에 맞추어 사설을 붙여 가는 소리이며, 장단도 ‘대마디 대장단’으로 복잡한 기교를 부리지 않는, 즉 잔가락이 없는 장단으로 소리를 운용하여 가는 것이 특징이어서 그 만큼 창제가 고졸하다. 이 동편제는 판소리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서편은 후천적인 수식과 기교에 의존하는 창제로, 가공과 수식과 기교로 소리를 만드는 유파라고 할 수 있다. 고졸하고 소박했던 동편제의 창법을 다듬어서 새로운 시대적 감정에 부응한 것이 곧 서편제의 창법인데, 기술적인 면에서 그만큼 향상된 것이며, 정통 창법으로부터 해방된 창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판소리를 지역적인 자연·인문 환경과 연관 지어 보면, 발생학적으로 동남부 산간 지역이 우조를 주장하여 웅건 청담하게 소리를 운용하는 동편 소리와 관련이 있으며, 계면을 주장하여 만수화란(萬樹花爛) 격으로 연미부화(軟美浮華)한 서편 소리는 서부 평야 지역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조와 계면조의 이러한 특징은 판소리의 하나의 거대한 신체[서편제든 동편제든]를 이루는 것이지, 우조=동편제, 계면조=서편제라는 등식은 통용되지 않는다.
판소리의 유파를 동편제와 서편제, 중고제로 나누어 본다면, 먼저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인 남원·순창·곡성·구례 등지에서 전승된 소리로서, 가왕으로 일컬어지는 운봉 출신 송흥록(宋興祿)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우조[씩씩한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감정을 가능한 절제하며, 장단은 ‘대마디 대장단’을 사용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발성은 통성을 사용하여 엄하게 하며, 구절 끝마침을 되게 끊어 낸다.
서편제는 섬진강 서쪽 지역인 광주·나주·담양·화순·보성 등지에서 전승된 소리로, 순창 출신이며 보성에서 말년을 보낸 박유전(朴裕全)의 소리 양식을 표준으로 삼는다. 계면조[슬픈 가락]의 표현에 중점을 두며, 발성의 기교를 중시하여 다양한 기교를 부린다. 소리가 늘어지는 특징을 지니며, 장단의 운용 면에서는 엇부침이라하여 매우 기교적인 리듬을 구사한다. 또한 발림[육체적 표현·동작]이 매우 세련되어 있다.
중고제는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전승된 소리로, 송흥록과 동시대 사람인 강경 출신 김상옥으로부터 출발되었다. 음악적 특색은 비동비서(非東非西), 혹은 동편·서편의 중간인데, 일제 강점기 이후 전승이 끊어졌다.
위와 같은 구분법에 따라서 지역적으로만 본다면 분명 고창 지역은 서편에 속한다. 즉, 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인 서부 평야 지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창 지역 출신의 명창들과 고창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명창들의 내력을 보면 동과 서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김수영과 김창록, 김찬업 등의 명창이 동편에 속했으며, 신재효의 문하에서는 동편·서편을 모두 아우르는 명창들이 활동했다. 즉, 김세종·박만순·정창업 등이 동편에 계보에 속했고, 이날치는 대표적인 서편에 속하는 명창이었다. 김세종으로부터 소리 수업을 받았다는 진채선도 동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자연·인문 환경적 배경
전라북도의 인문·자연 환경을 보면,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뻗어 있어 대체적으로 산간 지역[무주·장수·진안·임실·순창 일부]을 이루고 있고, 서북 사면 완주 일부·이리·익산·옥구·군산·김제·정읍·부안·고창 ]에는 널따란 평야 지역이 펼쳐져 있으며, 동남 사면[임실 일부·남원 일부·순창 일부]에도 평야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 중 고창은 전라북도의 서남단에 위치하여, 노령산맥이 서남향으로 줄기차게 뻗어 내리다가 우뚝 멈춰 선 방장산[734m]이 갈재를 뒤로 하고 중첩하고, 방문산[640m], 문수산[621m], 고산[527.8m] 등 높이 500m 이상의 준봉이 연장해 있어 자연히 동남부가 높고 서북부가 낮으며, 남동부에 구릉 지대를 형성하고 서북부에 평야 지대를 이루고 있고, 그 서쪽 바깥으로는 바다에 접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 환경 속에서 형성된 음악 문화의 일면을 민요를 통해 살펴보면, 동북부 산간 지역에서 불리는 ‘메나리조’ 창법의 요소가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육자배기조 창법이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서부 평야 지역과 마찬가지로 교환창 노동요는 찾아볼 수 없고, 모두 선후창 노동요로 불리고 있는데, 대체로 발달된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노동의 분화에 따라 다양하게 음악적으로 분화 발달한 노동요들이 불려졌다. 이는 집단적인 두레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평야 지역의 대표적인 특징들이며, 노동이 중심이 되어 넓은 경작지를 효과적으로 경작하기 위해 조직되는 두레와 이때의 두레굿의 중심에서 음악적 틀을 잡아 주는 풍물굿도 서부 평야 지역의 대표적인 우도 농악이다.
사실, 고창을 포함한 서부 평야 지역의 음악 문화는 판소리와 같은 고도로 발달된 예술을 낳게 된 근본적인 토대이며 바탕이다. 고창을 대표하는 향토학자 이기화는 이러한 자연 환경적 맥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광대들이 평시에 부잣집에 한 번 기식을 하면 몇 달씩은 걸리게 마련이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가 바닥날 때까지의 기간을 계산해 보는 데서 오는 수치이다. 이와 같이 몇 달씩 기식할 수 있는 부잣집이 고창에는 마치 서른 집은 되다 보니 이곳에서 몇 년씩은 거뜬히 머물 수 있는 되었고, 그 사이에 훌륭한 선배 광대를 만날 수 있어 새로운 레퍼토리를 갖출 수 있는 이점이 따르게 되었다.”
2. 역사·문화적 배경
고창군은 마한 50여 국의 하나인 모로비리국이 있었던 곳으로, 백제 때는 모량부리현·상칠현·송미지현·상로현의 네 고을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시대까지는 고을 이름은 여러 차례 바뀌었으나, 대체로 구역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 고창의 별명인 모양은 옛 이름인 모로, 모량에서 딴 것이다.
고창군의 고인돌은 고창 땅이 위에서 언급한 자연·인문 환경의 천혜 조건이 좋아 청동기 문화가 꽃피웠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 이후 고창의 역사적 문화 형성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고창 지역 향토문화연구가인 이기화가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 건국 이후 공신들에게 내려진 사전(賜田)이 특히 많아서 그 후손들이 대거 낙향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로(使路)를 등진 불사이군의 충절 의식이 투철한 선비들의 은거지가 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전통은 판소리의 지역사에서 판소리의 발전과 부흥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문화적 요인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본래 판소리는 민중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당대의 부정부패한 관료를 풍자하고 잘못된 현실을 바로잡아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민중적 염원을 담고 있다. 즉, 판소리의 미래 지향적 이념과 사로를 등진 ‘충절’의 이념형이 서로 부합하여 같은 꼴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예술은 미흡한 현실에 대한 대상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고창 지역에서 판소리 문화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판소리 광대들의 예술 세계에 대한 “절실한 이해와 이들 사이의 상호 유대, 그리고 내면의 욕구 충족들이 조화를 이루게 되어 오랫동안 광대들을 보호해 주는 대부 역을 담당할 수 있었으며 또한 안식처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동리 신재효도 일찍이 그의 「자서가」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사나희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將相宅)에 못생기고/ 활잘쏘아 평통할까/ 글잘한다 과거할까…….
신재효의 판소리 지원 활동은 이 노래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신분과 시대적 한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일생일대의 사업이었다. 그는 중인층이라는 신분의 제약을 벗어나려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양반 사대부적 교양을 넓히며 고창의 향반들과도 교유를 가졌으며, 명목상의 신분 상승[통정대부, 가선대부]을 이루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신분 상승을 가로막는 현실적인 제약 앞에서 깊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고, 현실 속에서 성취할 수 없었던 욕구를 판소리를 지원하는 활동을 통해 실현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창 지역의 역사·문화적 맥락은 19세기 후반 판소리의 향유층이 양반층으로 점차 확대되었던 판소리사의 역사적인 맥락과 맞아 떨어진다. 신재효는 중인 신분의 중간자적인 위치에서 본격적인 양반층으로의 판소리 향유층의 확대와 유입의 시기에 판소리 이론을 정립하고, 예술적 규범을 세웠으며, 판소리의 부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창 판소리의 특징]
판소리는 시나위 무가 음악권을 중심으로 발달한 거대한 문화적 실체로서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지역적인 부분을 따로 떼어 놓았을 때는 독자적으로 그 의미를 갖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판소리는 한 지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서 다소 독자적으로 그 공동체 내에서 향유되는 토속 민요의 가창 범위를 벗어나 우리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 장르로 거듭난 양식이어서 고창 지역만의 특유한 판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역 판소리의 특징을 논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제까지나 전체적인 의미망, 즉 보편적인 판소리의 개념 속에서도 고창이란 특수한 범주를 설정하고, 이 보편과 특수의 범주를 거슬러 오르내리면서 그 의미를 따져 볼 수 있다. 판소리라는 전체적인 의미의 표면에 떠오르는 지역의 특수성을 포착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지역의 구체적인 역할과 색채, 그리고 그 현장성 등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창 지역이 판소리사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신재효란 문제적 개인이 출현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고창이란 지역성이 있었다. 우리는 앞에서 고창의 지역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충절 의식’, ‘은둔’, ‘사전’, ‘사로를 등진 불사이군’ 등 다소 추상적인, 지역의 특성을 압축한 단어들을 살펴본 바 있다. 그리고 판소리의 미래 지향적 이념과 사로를 등진 ‘충절’의 이념형이 서로 부합했으며, 같은 꼴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하였다.
고창 지역이 판소리의 또 하나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시기, 곧 19세기 후반은 판소리 향유층이 양반 계층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판소리 공연은 중앙이나 관아의 나례희, 과거 급제자의 행사였던 은영연·홍패고사·문희연 등의 큰 행사나 민간의 축제였던 고을굿·마을굿 등의 저자거리에서 양반가의 안방으로 확대 안착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개인적이고 좁은 실내의 밀폐된 공간은 높은 학식과 고도의 테크닉, 높은 수준의 음악성을 요구했으며, 판소리는 여기에 부응해 나갔다.
고창 판소리의 특징 중에 비상하게 자랑할 만한 점 중의 하나는 고창의 판소리가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미래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고창의 신재효는 최초의 여류 명창을 탄생시켰으며, 판소리 분창을 시도하여 창극화의 단초를 제시함으로써 판소리의 발전 방향을 미리 예시했던 것이다.
[고창이 배출한 판소리 명창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창 지역은 후기 8명창 시대[헌종·철종·고종 대]를 전후로 대명창이 많이 배출된 고장이다. 가장 연대가 오래된 김수영을 필두로 김창록, 김찬업, 진채선, 김토산, 김성수, 김여란, 김소희 등과 판소리사에 큰 변동을 불러일으킨 판소리의 후원자이자 이론가·지도자인 신재효를 배출함으로써 고창 지역만의 판소리 문화를 특징짓고 있다.
신재효의 출현은 판소리계에 지각 변동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판소리의 발전 방향을 가늠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고창은 고창 지역에서 태어난 명창들뿐만 아니라, 신재효 문하에서 활동했던 많은 명창들을 더하게 되어 풍부한 판소리 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는 19세기 후반 고창 출신 명창들과 신재효 문하의 명창, 신재효 이후의 명창들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1. 고창 출신의 명창들
1) 김수영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수영은 흥덕 출신으로, 신재효 문하에 있었던 박만순·이날치의 동배로서 꽤나 명성이 높은 명창이었다고 한다. 동서에 “서편의 요령을 잃지 아니하고”라는 대목으로 보아 서편 소리를 하였으며, ‘중모리는 특수하게 잘하였고’, 「수궁가」 중 ‘토끼 수궁 가는 대목’이 그의 특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알려진 고창 출신 명창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명창으로 확인된다. 고창 출신으로 그의 선배 명창들이 있을 것이나, 현재 전하는 이가 없다고 하며, 사승 관계 역시 알려진 것이 없다. 아들인 김찬업에게 소리를 가르쳤을 것이지만, 이에 대한 사항도 전하는 것이 없다고 한다.
중요한 점은 그가 서편 소리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전통적으로 고창이 서편 지역에 속해 있으며 서편 소리가 전해져 왔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이에 관해 이보형은 “김수영을 비롯하여 다른 전라북도 서부 출신 명창들 중 서편제 소리를 한 명창들이 두루 많았고, 기타 여러 문화적 정황으로 봐서 전라북도 서부가 본디 서편제 전승 지역이었던 것이 뒤에 동편제 소리를 배운 명창이 대거 출현하면서 동·서 소리가 복합하여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 김창록
김수영이 흥덕에서 난 명창이라면, 김창록은 무장에서 난 명창이다. 뒤에 흥덕에서 살았고, 80여 세까지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철종·고종 대에 활동했는데, 동편제 소리로는 박만순·김세종에게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심청가」는 전무후무할 정도로, 그를 능가할 명창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의 특장은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공양미 3백 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 제수로 상고 선인에게 끌려갈 때 부녀가 이별하는 대목이었다고 한다.
3) 김찬업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김찬업은 흥덕 사람으로, 김세종에게 배웠다는 기록은 없지만, 신재효 문하의 김세종에게도 배웠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포착된다. 김창록이 김찬업을 가리켜 “소리의 이면을 깊이 아는 것이나 제작의 고상한 것이 아울러 출중한 점이 많았다.”고 평한 점이나, 『조선창극사』에 소개되어 있는 일화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조선창극사』에는 “어느 때 정창업이 모처에서 「춘향가」 중 ‘문 열고 사면을 둘러보니’라고 하는 대목에 이르러 우조로 훨씬 장완하게 불렀다. 또 「흥보가」 중에서 ‘도승이 내려오는데 장삼 소매는 바람에 펄렁펄렁’이라고 하였다. 김찬업은 곁에서 다 들은 후에 창처의 실격된 것을 일일이 지적하여 말하기를 ‘〈문을 열고〉를 그리 장완하게 할 필요가 없다. 문을 열고는 좀 단하게 하고 〈사면을 둘러보니〉는 훨씬 우조로 장완하게 하여야 하고, 〈장삼 소매는 바람에 펄렁펄렁〉 하는 데는 광풍이 대작하는 배도 아니오 미친 중이 동작하는 것도 아닌데 웬 소매가 그리 펄렁펄렁 할 리가 있겠느냐, 하면서 부드러운 춘풍에 도승의 〈장삼 소매는 바람에 팔팔팔〉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하였다 한다.
이보형에 의하면, 김찬업은 박만순·김세종과 같은 대명창들에게 판소리를 배워 국창의 반열에 오른 명창이며, 김창록과 더불어 조선 후기 고창 출신 명창으로 쌍벽을 이룬다. 그가 정응민에게 가르친 김세종제 「춘향가」는 현재까지 매우 우수한 「춘향가」 바디로 평가되고 있고, 또 정응민을 통해 정권진·조상현·성우향·성창순에게 전승되어 오늘날까지 전승되는 것이니, 한국의 판소리사에 큰 업적을 남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2. 신재효 문하의 명창들
1) 김세종
김세종은 전라북도 순창군 인계면 복실시마을에서 태어나, 후에 팔덕면 월곡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헌종 때부터 고종 대까지 3대에 걸쳐 활동했으며, 송우룡(宋雨龍)·박만순과 같은 동파에 속한 대가였다. 신재효의 문하에서 다년간 지침을 받았으므로 문견의 고상함이 다른 광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한다.
신재효 문하의 명창들 중 가장 먼저 김세종을 다루고자 하는 것은, 김세종이 당시 명창들 중 가장 깊숙하게 신재효와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신재효로부터 다년간 지침을 받았다는 것은 가장 오랫동안 신재효 문하에서 활동했고, 판소리 이론에서도 일종의 밀월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대의 판소리 이론가로 신재효가 있었다면, 그 실천가로서는 명창 김세종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김세종은 신재효 문하에서 대표적인 소리 선생으로 활동하였다. 신재효가 키워 낸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도 다름 아닌 김세종이 소리를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신재효와의 밀접한 관계 때문인지 김세종은 문식이 넉넉했으며, 판소리 명창 중에서도 이론과 비평이 당세 독보로 자타가 공인한 바였다고 한다. 박만순이 한창 이름을 날릴 때는 누구든지 그 앞에서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혹 입을 열어 잘잘못을 논평하더라도 박만순은 경청은 고사하고 일언지하에 부정을 했는데, 홀로 김세종이 비평을 하고, 비평을 하면 박만순도 그 적절함에 항상 수긍했다고 한다.
김세종은 특히 너름새를 강조하여, “창극조는 물론 창을 주체로 하여 그 짜임새와 말씨를 놓는 것과, 창의 억양반복, 고저장단에 규율을 맞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형용 동작을 등한히 하면 아니 된다. 말하자면 창극인만큼 극에 대한 의의를 잃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다.
김세종은 특히 「춘향가」를 잘했는데, 그 중에서도 ‘천자뒤풀이’는 당대 독보였다. 현재도 대부분의 소리꾼들이 ‘천자뒤풀이’는 김세종의 더늠으로 부르고 있다. 김세종의 「춘향가」는 흥덕 출신 김찬업을 통해 보성 소리에 흘러들어 현재 가장 활발하게 불리는 소리로 성장하였다.
그런데 김세종의 소리는 송흥록을 시조로 삼는 남원과 구례 일원의 동편 소리와는 다른 계열이라고 한다. 이보형은 김세종의 소리가 송흥록에게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로 조선성악연구회에서 인력거꾼으로 일했던 한씨 노인의 말을 들고 있다. 송만갑이 전하기를, 김세종이 송흥록에게 소리를 배우러 오니 송혹록이, “너의 김씨 문중 소리가 송씨 문중 소리만 못한 점이 무엇이 있느냐. 가서 김씨 문중의 소리를 닦아라.” 하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하나만으로 김세종의 소리가 송흥록의 소리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김세종이 송흥록의 소리를 무척이나 열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박만순
박만순은 1830년(순조 30) 고부군[현 전라북도 정읍시 정우면 수금리]에서 태어났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박만순은 헌종·철종·고종 3대간에 일세를 진동한 명창인데, 가왕 송흥록의 의발(衣鉢)을 받은 직계 문인으로, 당대 동파[동편제 소리]의 수령으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그는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박유선, 신만엽, 김제철, 방만춘, 주덕기, 송광록 등 전기 8명창 이후 동파의 최고 대가였던 것이다.
박만순은 처음에는 주덕기 문하에서 수업을 받다가 후에 송흥록의 문하에 들어가서 약 10년 동안 소리를 배웠는데, 그 수련의 과정이 남다르게 혹독했다고 전한다. 동파의 시조인 스승 송흥록의 소리의 진면목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밤낮 없이 스승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한데에서 먹고 자기를 다반사로 하였고, 임실군 어느 폭포 밑에 가서 성음을 위한 피나는 수련으로 피도 다량으로 토했다. 결국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폭포 밑에서도 천봉만학간(千峰萬壑間)에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소리가 빼어난 만큼 자만도 대단했는지 『조선창극사』에서는 “성격이 오만한데 겸하여 기예가 탁출하므로 그 자부와 자만이 일세를 예시(睨視)하였다.”고 하고, 그의 자고적(自高的)인 태도를 ‘백안간타세상인(白眼看他世上人)’의 시구에 비유하고도 있다. 실제로 박만순은 스스로 흥미가 나지 않으면 죽도록 태장을 맞으면서도 권세의 위력에 불복하였다. 이렇듯 자고적이기는 하나 지조 높은 태도에 한편으로 만인의 칭송을 받기도 했으나, 한편으론 그 오만함에 미움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당시 탐학하기로 소문난 충청도관찰사 조병식의 소리 요청을 거절한 일화에서 잘 전해지고 있다. 그는 조병식의 소리 요청에 “대원군께서 소리를 봉하여 가지고 오라고 하셨으니 소리 봉지를 뗄 수가 없다.”고 단박에 거절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대원군이 묘수를 짜 내어 “박모의 소위는 죽여 마땅하니 임의묘처하되, 다만 그 절세적 창극조를 한 번 듣고 죽임이 가하다.”는 서간을 보내 결국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를 통해서도 박만순이 자신의 소리에 대한 자부와 자만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우조를 주장하여 판을 짜는데, 전력을 다하여 한 번 내지르면 그 세세통상성(細細通上聲)이 완연히 반공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듯하고, 각양각색의 묘기는 사람을 혼취케 하여, 그 힘 있고 맑고 아름다운 성음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전한다. 대원군은 이러한 그의 소리를 특히 애호하여 선달에 봉하기도 하였다.
송흥록의 법통을 이은 박만순은 한때 송흥록의 사질이었던 송우룡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백중을 다투었으나, 송우룡이 중년에 성대가 상하면서 어느 누구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박만순은 다른 명창들의 소리를 자주 비평했는데, 그의 소리가 동파의 소리로는 가히 독보적이요 명성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데다 이와 같이 비평을 일삼으니, 다른 명창들은 감히 그의 앞에서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당대 서편의 명창이었던 이날치만은 이에 개의치 않고 자유자재로 자신의 특색을 발휘하였다. 이는 이날치가 동편의 소리와는 다른 서편의 대가였던 탓이기도 하겠지만, 신재효의 문하에 있었던 김세종·박만순·이날치 등 내로라하는 명창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예술에 대해 인식이 투철했던 것은 판소리 이론가이자 지도자였던 신재효의 영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3) 이날치
명창 이날치는 후기 8명창 중에서 서편 소리를 대표하는 소리꾼이다. 신재효의 문하에 동편으로는 박만순·김세종 등 기라성 같은 소리꾼들이 있었다면, 서편 소리꾼으로는 이날치가 있었다. 이로서 고창 지역은 신재효를 중심으로 동서 계보를 모두 아우르는 하나의 문화적 집단을 형성하면서 판소리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이날치의 자는 경숙(敬淑)으로,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어나 만년에 장성으로 이거하여 살았고, 향년 72세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날치는 예명인데, 칼날 같은 성품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고도 하고, 날쌔게 줄을 잘 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날치의 고향에 대한 최근의 보고[『금호문화』 1991년 5월호]를 보면, 본래 이날치는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유씨 집안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유씨 집안의 한 사람이 후에 수북면 대방리로 이사를 가게 되어, 그때 이날치도 따라서 수북면 대방리로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는 한 노인네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날치는 처음에는 광대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줄타기의 명수가 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줄타기 광대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지 당대 동편제 소리꾼인 박만순의 수행 고수가 되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목청이 좋으면 광대가 되고, 목은 안 좋아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면 악기를 다루는 잽이꾼이 되고, 그것이 되지 않으면 줄타기를 배워서 줄쟁이가 되고, 그것도 가능하지 않으면 땅재주를 연마해서 땅재주꾼이 되고, 이도저도 불가능하면 잔심부름이나 하는 방석화랭이가 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이날치는 이 순서를 거꾸로 올라가면서 자신의 재능을 펼쳐 나갔던 셈이다.
그러나 명창의 뜻을 품고 수행 고수 노릇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박만순과 숙식을 함께하면서 그의 소리와 기예의 수법을 보고 들으며 수련하던 이날치는 앞서 언급했듯이 박만순의 오만한 성품에 뜻을 맞추기 어려웠다. 더구나 10년이나 연상인 자신에게 고수라고 경멸하며 온갖 시중을 들게 하고, 심지어는 세숫물과 발 씻을 물을 떠 오라 하자 울분이 폭발하고 말았다. 대야에 물을 떠 온 이날치는 박만순의 얼굴에 쏟아 버리고 그 길로 박만순의 곁을 떠나,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 들어가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득음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날치가 곧 대명창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이날치의 대성은 서편제 소리를 창시했다는 박유전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지도 아래 서편 소리를 절차탁마한 결과였다. 박유전은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대원군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사람인데, 대원군이 실각하자 낙향하여 말년에는 보성에서 살며 정재근(鄭在根)을 가르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치는 수리성[거칠고 탁한 소리]의 큰 성량과 슬프도록 한이 서린 목소리를 장기로 하여 서편 소리를 섭렵해 나갔고, 마침내 서편 소리의 묘미를 체득하여 박만순·김세종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식자에 한해 칭찬을 받았던 박만순의 동편 소리와는 달리 이날치의 소리는 남녀노소·시인·묵객·초동목수[나무꾼] 할 것 없이 찬미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춘향가」와 「심청가」에 뛰어났고, 박유전에게서 이어받은 「새타령」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그가 「새타령」을 부르며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내면 진짜 새가 그 소리를 듣고 날아왔다고 전하며, 또한 수리성이 얼마나 컸던지 「춘향가」 중에서 ‘신관 사또 부임 대목’을 할 때 나팔 소리를 흉내 내면 실제 나팔 소리와 구별이 안 될 정도였고, “인경 소리가 뎅뎅” 하고 소리를 하면 정말 인경 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이날치의 「새타령」은 근대에 이르러 이동백의 「새타령」으로 이어진다. 이후 그의 소리는 김창환(金昌煥)과 전도성(全道成), 김채만(金采萬) 등으로 이어진다. 강한영에 의하면, 신재효 문하에 있던 이날치의 소리는, 신재효의 사설 중에서 「춘향가」의 ‘주안상 대목’ 같은 것이 이날치-김창환-정창업-정정렬(丁貞烈)을 거쳐 정광수(丁珖秀)로 이어져 왔다고 한다.
4) 정창업
정창업은 철종부터 고종 양대에 걸친 명창으로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면, 정창업은 앞서 언급한 “박만순, 김세종, 이날치의 조금 후배로서, 서편제에 속하는 명창인 만큼 계면조를 위주로 판을 짜는 솜씨인데, 고매하기는 박만순에게 비견할 수 없고, 웅혼하기는 이날치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역시 자가의 특색으로 일세를 울린 대가”였다고 한다.
정창업은 서편제 소리의 비조로 알려진 박유전의 제자라고 알려져 왔으나, 『진채선 생가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결과보고서』에는 이견이 제시되어 있는데, 정창업의 친손자로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정광수가, 정창업의 소리는 박유전의 소리와는 관련이 없는 별개의 소리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신재효 문하의 대표적인 서편 명창이라 하면 앞서 언급한 이날치가 대표적인 인물이고, 그 뒤를 잇는 것이 바로 정창업인데, 조금 선배인 이날치가 서편의 비조 박유전의 문하에서 절차탁마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당대에 명창이 된 정창업 또한 서편의 창시자인 박유전의 문하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정창업의 소리는 김창환과 정정렬에게 이어져 일제 강점기에 대단한 세력을 자랑했으며, 현재는 김창환 바디 「흥보가」와 정정렬 바디 「춘향가」로 전승되고 있다.
정창업이 전주대사습놀이에 나가서 「춘향가」 중 ‘나귀 안장 짖는 대목’에 가사가 막혀 근신했다는 이야기는, 공연 중에 명창의 실수가 있다는 것을 전하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인즉슨, “이도령이 광한루 구경차로 나갈 적에 방자 분부 듣고 나귀안장 짓는다. 나귀안장 지을 적에 나귀등에 솔질 솰솰”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 가사가 딱 막히는 바람에 “나귀 등에 솔질 솰솰”을 수십 번이나 반복하는 바람에 좌중이 “저 혹독한 솔질에 그 나귀는 필경 죽고 말 터이니 차마 볼 수가 없다.”고 야유하자, 이내 퇴장한 후론 일시 낙명이 되어서 수년간 소리를 중지하고 근신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에 실수를 교훈삼아 각고 탁마하여 크게 대성하였다. 「흥보가」를 잘하였으며, 더늠으로서는 「심청가」 중에서 ‘봉은사 화주승이 심봉사를 구하려고 내려오는 대목’이다.
5) 전해종
전해종(全海宗)은 전라북도 부안군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헌종·철종·고종 3대에 박만순·김세종·이날치 등과 나란히 명성을 떨쳤던 대가이다. 『조선창극사』에 의하며, 전해종 또한 수년간 신재효의 문하에서 지침을 받았으며, 「숙영낭자전」과 「심청가」에 장하였다고 한다. 그의 더늠은 「심청가」 중 심청이가 인당수에 빠졌다가 연화봉(蓮花峯)을 타고 다시 환세(環世)하는 대목인데, 이는 신재효가 여러 고전을 참고로 윤색, 개작한 사설의 일부분인즉, 신재효가 개작한 사설이 실제로 명창의 소리로 불렸다는 점을 실증해 주고 있는 대목이어서 그 의미가 크다.
6) 진채선
진채선은 고창이 낳은 최초의 여류 명창이다. 당시 여성 판소리 창자의 출현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으로서, 판소리사적으로 볼 때 가장 의미심장한 일 중 하나이며, 이후 근대에 수많은 여성 명창이 등장하는 전례가 되었다. 여성이 부르는 판소리의 새로운 역사는 결코 진채선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여성 판소리 명창이 출현하기까지는 그간의 인습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이 필요했으며, 이 일을 일구어 낸 것이 바로 고창 지역이 자랑으로 삼는 역사적 인물 신재효였다.
당시 판소리적 관습에서 볼 때, 여성이 판소리[창극조]를 입 밖에 낸다는 것은 여성이 갓을 쓰는 것과 같이 관습적 금기를 깨는 일이었으므로 스스로 파멸을 자초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에 여성이 창악을 하는 경우는, 주로 기생·사당패·무녀 등이 직업상 노래를 부르는 경우로서, 주로 시조·가곡·가사 등에 그쳤고, 판소리나 잡가 같은 것은 절대 금물이었으므로 애초부터 그네들의 레퍼토리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고종 말년에 이르러 세속에 잡가가 유행하자, 여기(女妓)들도 잡가를 했다고는 하나 판소리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진채선은 1847년(헌종 13)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심원면 검당포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여양(驪陽)으로, 그녀의 신분은 당시 천한 계층이었던 세습 무당의 딸이었다. 진채선은 무당이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등 너머로 소리를 익혔으며, 단골 학습을 통해 판소리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판소리는 대부분 무당 가계의 무부들이 불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진채선이 자연스럽게 판소리를 귀동냥하여 익힐 수 있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채선은 판소리는 아닐지언정 당시 집안이나 무부 계열의 선생들로부터 소리를 배워서 상당한 소리 실력을 쌓았으며, 그들이 다리를 놓아 신재효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판소리를 배우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진채선이 판소리를 하게 된 것은, 당시에 어느 정도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할지라도, 무엇보다 신재효의 실험 정신과 지도에 의한 결과였다. 진채선은 신재효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동리정사에 드나들던 당대의 명창 김세종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이로써 진채선은 판소리라는 예술을 매개로 신재효와 끈끈한 사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진채선의 소리가 무르익을 즈음, 신재효은 그의 야심에 찬 문화적 기획을 꿈꾼다. 그것은 다름 아닌, 1867년(고종 4)에 있었던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진채선을 대중 앞에 선보이는 일이었다. 이때 김세종과 함께 한양에 올라간 진채선은 「고사」와 「방아타령」 등을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일을 계기로 진채선은 대원군의 눈에 들어 대원군의 집에 대령 기생으로 기거하게 되었다.
신재효가 한양에 간 진채선이 내려오지 않자 진채선을 그리며 “스물네번 바람불어 만화방창 봄이되니……”로 시작되는 「도리화가(桃李花歌)」를 지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 노래 끝에 ‘경오년[1870년] 칠월칠석’이라는 부기는 당시 스물네 살로 암시되는 그녀의 나이를 되짚어 출생 연대를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대략 진채선이 대원군 곁에 머문 기간은 1867년 경회루 낙성연부터 대원군이 실각한 1873년(고종 10)까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진채선뿐 아니라, 다른 명창들도 모두 하향을 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몰락한 후 진채선의 행적은 아무것도 확실하게 전하는 것이 없다. 대원군 몰락 후 진채선이 고향에 돌아와 스승에게 문안을 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으나, 진채선이 낙향한 것이 확실하다면 그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와야 할 것인즉, 아직까지 진채선에 관한 기록에는 그러한 이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이렇다 할 증거들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당시 궁궐에 있다가 밖으로 나온 궁녀들의 운명과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궁궐 밖으로 나온 궁녀들은 혼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랐다. 그리고 출궁녀를 첩으로 삼거나 간음하는 경우에는 엄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대원군과 관계를 맺은 진채선은 고향에 내려오지 못하고 조용히 은거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저 간간히 소식을 전하다가 행적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마감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진채선은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 시대를 진동했고,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으나, 당시 시대적 제도가 부여한 궁궐녀의 운명에 따라 비극적인 말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소리는 『조선창극사』의 ‘여류 광대의 비조 채선’ 조에 「춘향가」 중 ‘기생 점고하는 대목’이 소개되어 있으며, 그저 소리 없는 울림으로 전해질 뿐이다.
3. 근현대의 고창 출신 명창들
1) 허금파
명창 허금파는 고창이 배출한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 이후 두 번째로 등극한 고창 출신 여류 명창으로 알려져 왔다. 판소리에 관한 한 지금까지도 권위 있는 연구서이자 명창 열전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창극사』와 『판소리 이백년사』 등에서 허금파를 그렇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의 논의에서 허금파가 신재효의 지침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창 출신이 아닐 것이라는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필자가 시기적으로 김소희보다 훨씬 앞서는 허금파를 뒤늦게 상론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연유이다. 그 동안 필자는 고창 지역 명창들의 생애와 예술을 다뤄 오면서 단지 고창 출신으로 제한하지 않고, 고창의 판소리 문화에 기여한 비중 있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고창의 명창 중 한 사람으로 다뤘다. 이것이 신재효가 판소리에 대해 취한 열린 정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판소리사에서 신재효 문하에 있었던 김세종·이날치 등 비 고창 출신 명창들을 제외한다면 고창의 판소리 문화를 논의한다는 것은 힘들 일일 것이며, 그 의미도 반감되고 말 것이다.
허금파가 고창 출신이 아닐 것이며, 신재효 문하에서 지침을 받았을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고 보고한 것은 최동현의 『진채선 생가 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서이다. 일찍이 고창의 신씨 집안과 인연을 맺고 신재효의 판소리를 평생 연구했던 강한영의 증언과 여러 가지 정황을 토대로 한 논의에서 최동현은 허금파 명창이 고창 출신이 아니라, 고창으로 이주하여 고창에서 활동하다가 고창에 뼈를 묻은 명창이라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다.
허금파의 생애와 활동을 보면, 그 예술 활동이 절정에 이르렀던 것은 원각사 시절 창극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인기를 얻었던 때라고 한다. 그러나 원각사가 폐쇄된 이후 허금파는 사계를 떠나 가정에 묻혀 살았다는 것이 공통적인 정론이다. 그리고 그 후의 허금파에 관한 소식은 전하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또한, 그녀의 장기는 「춘향가」였고, 특히 ‘옥중가 대목’을 출중하게 잘 불러서 청중을 울렸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그녀의 행적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원각사 시절이며, 그 후 가정에 묻혀 살면서부터는 공식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의 행적이 드러나는 시점은, 허금파가 고창에서 은방을 했던 남편을 만나 고창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진채선 생가 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 의하며, 강한영은 젊었을 적 고창에서 허금파를 만났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매우 늙고 추하게 되어 있었다고 하며, 경상도 말씨를 썼고, 길가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고, 늘 술에 취해 있었으며, 함부로 욕설을 하기도 해서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강한영은 허금파 명창이 원각사 시절 협률사 단원으로 다니다 남편을 만났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요한 점은 신씨 집안과 혼인의 인연을 맺고 누구보다도 신재효의 삶과 생애에 정통한 강한영이, 허금파 명창이 신재효의 제자일 가능성에 대해 ‘가당치 않은 말’이라고 일축했다는 점이다.
강한영의 누이이자 신재효의 4세손인 신형종의 부인 강한희 또한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강한희는 허금파를 경상도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며, 허금파의 딸 송월향이 고창에서 소리꾼으로 활동했는데, 대단한 미인이었고, 후에 고창면장을 역임했던 신재효의 증손자, 곧 강한희에게는 작은아버지였던 신기준의 후실로 들어가 자식을 낳고 살았다고 했다. 덧붙여 강한희는 허금파의 소리를 직접 들었는데, 옛날에 양조장이 있었던 숲정이라는 곳에서 풍류객들과 소리꾼들이 소리를 즐기며 놀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허금파가 그 절정기였던 원각사 시절 이후 고창으로 흘러 들어와 활동했으며, 또한 명창이었던 딸을 길러 내고 고창에서 생을 마감한 것을 알 수 있다. 『진채선 생가 조사 및 검당마을 염정지 지표조사 결과 보고서』에 의하면, 허금파는 딸 외에도 아들 하나를 두었으며, 그 후손들이 고창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손들에 의하면, 허금파 명창은 1949년 84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의 묘소는 고창읍 월곡리 산108-1번지에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일세를 풍미했던 명창 하나가 고창에 뼈를 묻은 셈이다.
진채선의 뒤를 이은 허금파 명창이 고창에 뼈를 묻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녀는 여류 명창이 탄생한 고창에서 그 명맥을 이었다. 어느 누구도 허금파의 고창에서의 말년이 신재효와 여류 명창 진채선 신화의 후광이 아니었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와 같이 최초의 여류 명창 진채선의 메아리는 허금파-송월향으로 이어져 잔향으로 메아리치고 있다.
2) 김여란
앞의 진채선 조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래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는 대원군 시절 진채선의 등장 이후 많은 여류 명창들이 배출되면서 판소리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김여란은 진채선을 이어 여류 명창의 흐름을 잇고 있는데, 1907년 고창 흥덕에서 태어났다. 김소희는 이보다 꼭 10년 뒤에 역시 흥덕에서 태어났다.
김여란은 어려서부터 판소리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소리꾼과 어울리기를 좋아해 집에다 명창을 자주 초대해 소리를 듣는 바람에 어린 나이에 벌써 소리를 근사하게 부를 수 있었다. 열 살 되던 해 근처 살던 김비취에게서 시조와 가곡 등을 배웠다. 그 후 김봉이에게서 「심청가」를 배우고, 다시 정정렬에게 7년간 「춘향가」·「적벽가」·「심청가」를 모두 배워 득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1929년에 대구에서 판소리 발표회를 가졌는데, 만원을 이룬 청중들로부터 아홉 차례나 재청을 받았다 하니 그의 기예를 짐작할 만하다. 그 무렵의 여류 명창으로는 이화중선과 박녹주를 들 수 있다. 김여란은 빅타레코드와 계약하여 음반을 취입하기도 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도 하면서 명성을 높였다. 중하성이 발달하여 묵직한 느낌을 준다. 그는 여류 명창으로는 드물게 판소리를 고수한 인물이다. 한때 화랑창극단에 참여한 적도 있지만 이내 그만두고 판소리에만 전념했다.
해방 후 김여란은 서울에다 민속예술학원을 설립하고 그때부터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고, 1957년 학원을 확장하여 수도국악예술학원으로 승격시켜서 학생들에게 판소리·기악·무용 등을 전수하였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문하에서 박초선(朴招宣)·최승희(崔承姬) 등 여류 명창 후보가 배출되었다.
김여란의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정렬의 소리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정렬은 전라북도 익산군 망성면 사람으로,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던 근세 5명창 중의 한 사람이다. 가장 나쁜 성대라고 하는 ‘떡목’을 가졌는데도 지독한 노력으로 대성한 사람이다. 정정렬은 떡목이기 때문에 고음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저음은 그렇게 실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소리를, ‘도끼로 장작 패는 소리’라고도 한다. 또 “임방울의 소리가 잘 다듬어진 예쁜 조약돌 하나가 떨어지는 것 같다면, 정정렬의 소리는 큰 바위덩어리가 떨어지는 것 같다.”고도 한다. 정정렬은 “30년 앞을 내다보고 소리를 했다.”고 할 만큼 미래 지향적인 소리꾼이었다.
그는 밋밋한 판소리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우선 장단에서 엇부침의 기교를 거의 극한까지 추구해 마지않았다. 아기자기한 정정렬 판소리의 부침새는 판소리 리듬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 왔다고 할 만하다. 또 그는 다양한 성음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다양하게 음질을 변화시켜 가는 그의 판소리는 온갖 꽃과 무늬가 수놓아진 비단에 비유할 수 있다. 발성도 평평하게 하지 않고 변화를 준다. 소리를 크게 흔드는 창법을 구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판소리 청중의 변화된 기호와 감성을 좇아 슬픈 가락[계면조]을 확대시켰다는 점이다.
‘오리정 이별’이 첨가되면서 「춘향가」는 이별 대목이 길어지게 되었다. 이별을 춘향 집에서 한 번 하고, 또 오리정에서 하게 되니, 결국 두 번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정렬은 새로운 대목을 첨가함으로써 슬픈 가락을 늘여 나가기도 했지만, 기왕에 있던 대목들도 가급적 슬픈 가락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판소리의 모든 흐름이 바로 현대 판소리의 흐름이 되었다. 그러기에 정정렬이 30년 앞을 내다보고 소리를 했다고 하는 것이다.
정정렬은 많은 제자를 두었다. 특히 「춘향가」의 경우 김소희·박녹주(朴綠珠)·김연수·박동진(朴東鎭) 등이 그 소리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정정렬의 소리를 오롯이 이은 사람은 김여란이다. 김여란의 소리는 최승희와 박초선이 이었지만, 그중 최승희가 가장 충실하게 계승했다. 사제 관계가 분명한 경우에는 목[발성 기교]이 같을 수밖에 없는데, 최승희는 김여란과 언뜻 들어서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목이 닮았다. 이는 최승희가 충실한 제자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정정렬제 소리는 김여란-최승희로 온전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3) 김토산
판소리의 주요한 거점이자 성지인 고창은 많은 명창들을 배출하였지만, 사실 이와 같은 명창들이 정작 고향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들은 고창에서 나서 전국을 무대로 시대를 풍미한 명창들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다루고자 하는 명창 김토산은 고창 판소리에 있어서 토속적인 전승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김토산은 서편 소리의 시조 박유전으로부터 시작해서 이날치-김토산-김성수로 이어지는 고창 서편 소리의 맥을 이은 장본인이다. 이와 같은 토착적인 흐름은 고창에 많은 명창들을 머물게 한 판소리의 지도자 신재효의 영향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니,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유전자와 자양분은 눈에 보이지 않되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김토산은 1871년(고종 8)에 태어나 1950년대 중반까지 살았으며, 그의 제자 김성수에 의하면, 흥덕면 후포리 뒷개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이 뒷개라는 이름은 1945년경 후서로 개칭된다. 김토산은 일곱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하는데, 김토산의 할아버지는 앞서 소개한 서편 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에게 배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김토산의 가계가 대대로 전라도 중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무업을 하면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집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날치 같은 대명창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은 이른바 ‘큰무당’이 아니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토산은 정읍군 태인에서 살던 전도성과 가까이 교유하였고, 당시 정읍 지역의 대지주로 판소리 애호가였던 박문원과 김평창의 집에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때 임방울도 김토산에게 「수궁가」를 배웠는데, 김성수의 증언에 의하면 「수궁가」 중 ‘토끼화상 그리는 대목’은 김토산에게 배운 대목이라 한다.
김토산의 스승 이날치는 박유전에게서 「심청가」를 배우고 나름대로 공력을 들여서 서편제 「심청가」를 완성한다. 동편 소리에 비하여 훨씬 기교가 풍성하고 다양하며 부침새도 복잡하다. 김토산의 제자 김성수는 그의 소리에 대해 “떠지르는 목[상청]은 별 것이 없고, 말을 놓아 가는 게 특기”였다고 말한다. 목소리는 컸으나 고음은 별 것이 없었고 교묘한 부침새가 특기였다는 것인데, 이는 이날치 계통의 서편 소리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김토산은 『조선창극사』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박유전-이날치-김토산으로 이어지는 서편 소리로 일세를 풍미했던 광대임이 틀림없다. 사실, 그처럼 기록에서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운이 때를 만나지 못했거나, 일상의 삶을 꾸려 나가면서 소리를 즐기고, 그리고 소리의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판소리의 역사와 전통은 이와 같은 수많은 숨은 명창들에 의해 밑받침되는 것이다.
4) 김성수
본명이 김이수(金二洙)인 김성수의 집안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많은 집안이었다. 김성수의 할아버지 김기운은 대금의 명인이었다고 하며, 고모 김추월은 시조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아버지 김용달은 특별히 대가에게 공부를 한 전문적인 소리꾼은 아니었으나 목소리가 좋은데다 재주가 있어서 ‘들은 풍월’만으로 소리를 했는데, 「심청가」와 「춘향가」 중 이별 대목을 부를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생전의 김성수의 증언에 의하면, 김용달은 부안 출신의 기교적인 소리꾼 신영채(申永彩)와 교유를 했다고 하며, 이로 보아 김용달의 소리 수준은 상당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성수는 음악적인 집안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그가 소리에 이끌린 것은 아홉 살 때였다. 당시 살았던 마을에 협률사(協律社)가 들어왔는데, 포장을 칼로 찢고 들어가 구경하려다 몰매를 맞기도 했으며, 자신이 국악에 포부가 있으니 입장시켜 달라 통사정을 해서 결국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한다. 그때 공연했던 박동실, 공기남, 조상선 등의 소리에 그는 푹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되기 직전 그가 열다섯 무렵에 다시 협률사가 고창으로 공연을 오자 그 패거리에 따라붙었다. 그는 박동실의 심부름을 하면서 지성으로 그들의 소리를 배웠다. 그래서 웬만한 토막 소리는 다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김성수는 어려서 소아마비를 않은 관계로 오른쪽 다리가 온전치 못했다. 이와 같은 그의 신체적 불구는 그에게 번번이 실망과 좌절을 안겨다 주었으나, 그의 소리에 대한 열정을 꺾지는 못하였다.
그가 반해서 따라 나선 협률사의 박동실, 공기남, 조상선 등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유명한 명창들로 광주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특히 박동실은 목이 나빠 무대에는 자주 서지 않았으나 판소리의 작곡과 교육에는 뛰어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한때는 박동실에게 배우지 않은 소리꾼이 없다고 할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하며, 특히 담양 사람 박석기의 후원으로 해방 전 담양군 남면 지실에 있던 박석기의 집에 머물며 많은 제자를 가르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 그에게서 배운 제자로는 김소희, 한승호, 한애순, 장월중선 등을 들 수 있다.
박동실 단체를 떠난 이후 김성수는 임방울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저 임방울이 좋아서 따라 다니며 심부름이나 해 주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김성수는 임방울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듣게 된다. 그것은 바로, 당시 고창 흥덕에 살고 있던 김토산의 “천추만대에 유전헐 소리가 있으니 배워 보라.”는 권유였다.
임방울의 권유를 받은 김성수가 김토산을 찾아간 것은 스물네 살 때인 1953년이었다. 김토산으로부터 「심청가」 전부와 「흥보가」, 「춘향가」, 「적벽가」의 토막소리 등을 배운 김성수는 선운사 앞에 있는 동문암에 기식하면서 2년여간 독공을 했다. 독공하기 위하여 선운산 깊은 곳, 일본 놈들이 뚫어 놓은 굴속에 들어가서 여러 달 거처하였다. 물론 그 사이에 목이 부어서 똥물을 먹은 것도 여러 번이라고 한다. 이때의 독공은 명창 김성수의 기반을 마련해 준 계기가 되었다. 김토산에게서 배운 소리는 이날치의 소리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날치는 박유전에게 「심청가」를 배우고, 나름대로 공력을 들여서 서편제 「심청가」를 완성한 사람이다.
그는 그 뒤에 다시 김연수에게 소리를 배우게 된다. 선운사에서 김토산으로부터 소리를 배운 뒤 스물예닐곱 되던 해부터 정읍 신흥동에 있던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으로 있게 되었는데, 당시 김연수는 「춘향가」의 사설을 정리하기 위해 선운사에 내려와 있었다. 김연수가 선운사에 머물며 사설을 정리하고 있던 3~4개월 동안 김성수는 선운사로 김연수를 찾아와 시중을 들었다.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배울 수는 없었으나, 본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리에 새로운 것을 더하는 형태로 김연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그에게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의 스승이 신영채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신영채는 김용달과 교유가 있었고 활동 지역이 비슷했기 때문에 자주 접촉이 있었고, 때로는 김성수가 그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기도 했다고 한다. 신영채는 본래 엿장수였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은 것이 근대 5명창 중의 한 사람인 전도성의 눈에 띄어 뒤늦게 판소리 가객이 된 사람이라 한다. 6·25전쟁이 끝날 무렵 부안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비참하게 죽기까지 주로 전라도 청중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던 그의 소리는, 성량이 작아 무대 소리에는 적합하지 않았으나 방안 소리에는 그보다 한 살 위인 임방울도 함께 소리하기를 꺼릴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정읍국악원의 소리 선생이 된 이후 그곳을 떠나기까지 17년간은 김성수에게 가장 어렵고도 괴로운 시기였다고 한다. 서른 살 때인 1960년 광주에서 개최된 명창대회에서 「흥보가」의 박타는 대목으로 1등을 한 것 외에 아무런 영광도, 명예도 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판소리가 몰락해 가는 마당에 판소리로 출세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의 생활은 흔적만 남은 몇몇 판소리 애호가들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어쩌다가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의 잔칫집에 초대받아 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성수는 마침내 “에이, 돈이나 벌겠다.” 하고 약장사·과일 장사·소금 장사 등을 해 보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못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아내마저 죽자 17년간의 정읍 생활을 청산하고 김제로 옮겨 앉게 되었다 한다.
김제로 이사한 김성수는 폐결핵까지 겹쳐 극도의 절망감 속에서 한동안 술로 나날을 보냈다. 이 시기를 ‘광인(狂人)’으로 지냈다는 그의 술회의 말은 그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운명과 처절한 대결을 벌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이때 목을 상하여 상청도 많이 줄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김제에 머물며 다시 가정을 꾸미고, 중증의 결핵도 판소리를 좋아하던 한 의사의 도움으로 낫게 되자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은 그는 당시 곳곳에서 부활되어 개최되기 시작한 판소리 경연대회에 자극을 받아 소리를 가다듬고 출전을 하게 되는데, 1981년에는 전주대사습놀이에서 2등에 입상하기도 했다.
1989년에는 전라남도 여수의 판소리 애호가들의 요청에 따라 여수로 이사를 하였다. 그곳에서 사설 학원을 운영하다가, 신나라 레코드사에 의해 「흥보가」 노정기와 박타는 대목, 「심청가」 후반부 등 독특한 그의 소리가 녹음되었으며, 이중 「흥부가」는 1991년 한 장짜리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성수는 취입을 마치자마자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전신 마비의 상태로 목숨을 이어가다 1993년 가을 세상을 뜨고 말았다.
김성수의 소리는 김토산에게 이어받은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그가 장기로 삼고 있는 「흥보가」와 「심청가」 중에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은 김토산 소리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대목이라고 한다. 김성수는 「심청가」를 완창할 수 있었는데, 사설은 김연수의 것을 빌려서 하지만, 소리는 김토산제’로 하였다 김성수의 판소리는 이날치-김토산-김성수로 이어져, 서편제 판소리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5) 김소희
천성이 예술가였던 김소희는 성음이 지극히 청미하고 애원이 깃들어 있고, 여기에 삶과 예술에 대한 꾸밈없는 태도와 기품이 더해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창으로, 또는 예인으로 추앙을 받아 왔다. 예술에서나 일상에서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단아하고 향기 있는 삶과 예술로 귀감이 됐던 김소희는, 한평생 소리꾼으로서 외길을 걸어 무소불통의 빛나는 예술혼을 불태웠던 예술가로서 예인들의 하나의 규범이 되었다.
김소희는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고려청자의 쑥물 든 하늘빛과 조선조 백자의 희다겨운 옥빛이 어려 있고, 가을밤 기러기 소리며 청전의 학울음 소리와 낙목한천의 찬바람 소리를 느끼게 했던 목소리”로 남아 있고, “평평한 목소리로 나가다 한량없이 높은 소리로 냅다 휘잡아 올려 가지고 거기에서 애절 비절하게 쥐어짜다가 톱질로 비벼 차근차근 말아 들이는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이던 명창”으로 기억된다.
김소희의 소리에는 여러 명창의 소리가 들어 있다. 「춘향가」에는 송만갑의 소리뿐 아니라, 정정렬과 김소희 자신의 소리가 들어 있다. 그녀는 동편·서편의 소리를 두루 섭렵하고 자기 소리로 승화시켜 김소희제를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누가 들어봐도 가성이나 꾀목을 쓰지 않고 담담하게 소리를 냈다. 군산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는 최동현은 19세기 말 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던 진채선 이래 우리의 여창 판소리가 이룩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으로 김소희를 꼽으면서, 윤곽은 크고 바르게 그리면서도 세부는 아기자기하고 부드럽게 엮어 가는 것이 그의 소리였다고 평한다.
김소희는 또한 ‘사통팔달한 예인’이었다. 이는 그가 소리뿐 아니라 전통 예술 전반에 걸쳐 두루 능했기 때문이다. 춤에 관한 김소희의 재능은 그의 발림에서 엿볼 수 있는데, 소리판에서 그녀만큼 적재적소에 부채를 펼치고 접는 소리꾼은 아마 드물 것이다. 부채를 무대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을 멋지게 그려냈고, 또 춤으로 다져진 기예의 덕으로 판소리를 부르면서 이리저리 무대를 왔다 갔다 하는 자태 또한 빼어났다. 이는 그가 춤에 일가견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붓글씨는 1967년부터 1969년 3년에 걸쳐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입선할 정도로 거의 프로 수준에 도달했고, 가곡이나 시조도 무대에 올라 부를 만큼 출중했다. 그의 판소리의 성음이 유독 미려한 것은 이런 가곡 발성의 영향도 있다고 평가된다. 김소희는 이렇듯 뛰어난 성음과 재능에 힘입어, 어린 나이에 레코드를 취입했다. 1930년 열여섯의 나이로 스승들과 나란히 레코드를 취입했는데, 레코드 취입을 위해 정정렬·한성준·오태석 등과 일본에 가기도 했다. 열아홉 살 때는 빅타레코드의 전속 소리꾼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창극 활동 및 라디오 방송 출연도 자주 했으며, 1936년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이동백 판소리 은퇴 공연 무대, 1939년에는 만주 하얼빈까지 순회공연을 가기도 했다. 1940년경에는 화랑창극단의 「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아 이도령 역의 박후성과 함께 청중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48년 김소희는 여성국악동호회를 설립해 이사가 되고, 최초의 여성 국극 「햇님 달님」을 무대에 올렸다. 「햇님 달님」은 우리 공연계에 여성 국극의 전성기를 가져오며 196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시기 김소희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대의 율객 박석기였다. 광복 이후 국립국악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거문고로도 유명한 율객이었던 박석기와의 만남은 그의 죽음으로 끝을 맺으며, 이들 사이에 김소희제 소리의 이수자인 박윤초를 남기기도 했다.
김소희는 다양한 무대 생활과 함께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맡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또한 제자를 기르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 중심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설립이 있으며, 김소희창악연구회가 있다. 1953년 6·25전쟁이 끝난 후 김소희에게는 여성국극동호회의 본부로 쓰였던 익선동 집터만이 남았다. 그녀는 그 땅과 패물 등을 모두 팔고, 그것도 모자라 여기저기에서 후원을 얻어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교장으로 박헌봉을 추대하고 자신은 평교사로 만족했다. 우리 민속음악을 길이길이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한 것이었다. 생전에 그녀는 자신의 소리 일생을 돌아보면서 이 학교의 설립을 가장 중요하고 보람 있는 일로 꼽았다.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와 함께 그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한 것으로는 김소희창악전수소가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정성을 다해 후학들을 지도했으나, 수제자로 꼽히던 안향련·김동애 두 명의 제자가 스승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아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안숙선·신영희·박윤초·한정아·유수정·박소영·김미숙·김차경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여류 명창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갔으며, 영화 「서편제」로 알려진 마지막 제자 오정해도 있다.
김소희는 제자들에게는 엄한 스승이었다. 친자식에게조차 원망을 들을 만큼 냉정했다. 그가 항상 제자들에게 했던 말에서 소리에 대한 그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소리의 길은 목이 터져 나가는 아픔을 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이 열정만이 예를 완성으로 이끌며, 오직 성실한 인격만이 사람을 완성으로 이끈다. 그러니 사람이 되고 나서 예를 완성하라, 그것이 참 예다.”
김소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판소리를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62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9회 국제민속예술제에 참가하여 이탈리아와 그리스, 터키 등으로 순회공연을 다녔으며, 1964년에는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뉴욕을 비롯해 미국 28개 주립대학 초청으로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했다. 그리고 1972년 카네기 홀에서 판소리를 불러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모두 일어나서 기립 박수를 치도록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이 공연의 실황 음악을 우리가 직접 들을 수 없지만, 공연이 성공한 후 미국에서 녹음한 음반은 지금도 그때의 감격이 대단했음을 되새기게 한다. 제목이 「판소리-한국의 서사 성악 예술과 기악곡」인 이 음반에는 김소희를 비롯해 지영희·성금연·김윤덕 등 명인들의 기예가 담겨 있다. 「판소리-한국의 서사 성악 예술과 기악곡」은 해외에서 공식적으로 녹음한 최초의 음반으로, 미국의 음반 회사인 Nonesuch Record의 Explorer Series의 하나로 1972년 녹음이 되었고, 이듬해인 1973년 LP음반으로 첫선을 보였다.
김소희는 「심청가」와 「춘향가」를 즐겨 불렀는데, 특히 「심청가」의 ‘범피중류’와 「춘향가」의 ‘적성의 아침’은 당시 누구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한다. 적당히 그늘진 듯한 음색으로 부르는 서정적인 노래는 다른 사람과는 분명 다른 묘한 매력이 있었는데, 김소희가 왕성하게 활약할 당시 ‘범피중류’나 ‘적성의 아침’은 다른 명창들이 부르기를 꺼려했다는 일화만으로도 그의 소리 공력이 어느 정도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1979년 김소희는 자신의 국악 생활 50년을 마감하는 무대를 마지막으로, 많은 무대를 후배와 제자들에게 양보하였고, 꼭 자신이 설 무대에만 올랐다. 그러면서 그가 치중한 것은 판소리와 함께 남도민요, 신민요, 구음시나위 등이었다. 판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남도민요 「흥타령」이나 「새타령」은 판소리보다 격이 낮은 예술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그는 이런 것에는 서사적이거나 극적인 판소리와는 다른 서정적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여 남도민요나 신민요, 구음시나위를 많이 살리려고 힘썼다. 김소희가 부른 「구음」은 영화 「서편제」의 마지막 장면의 배경 음악으로도 쓰였다. 그리고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에서는 「떠나가는 배」로 전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김소희는 늘 쪽을 지기에 편한 머리를 고집했다. 그래서 그의 곁에서는 늘 동백기름의 향기 같은 것이 풍겼다. 옥색 모시 치마저고리에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에 옥비녀를 꼽고 무대에 등장하면 그것 자체가 ‘예술’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쪽 진 머리가 가장 아름다웠던 여인, 조선조의 향기를 끝까지 간직했던 예인, 그가 바로 만정 김소희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