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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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分宜亭- |
영어공식명칭 | Bunuijeong Pavilion |
이칭/별칭 | 분의정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59-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철 |
소재지 | 분의정 터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5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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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정자 터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터.
[개설]
분의정(分宜亭)은 조선 인조(仁祖) 때의 명신(名臣) 청구(淸滾) 임담(林墰)이 지은 정자이다. 임담은 파직된 이듬해에 참지(參知) 및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지내다가 여름에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어 조정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분의정에서 머물렀다. 임담은 나주(羅州) 회진(會津) 사람으로 자는 재숙(載叔)이며,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임서(林㥠)이다. 대사성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지냈다.
1635년(인조 13)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인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총융사(摠戎使)의 종사관이 되어 남격대를 수비하였고, 진휼 어사(賑恤御使)의 임무를 띠고 호남(湖南)으로 내려가 선정을 베풀기도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고, 도적을 토벌한 공로로 가의 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전지와 노복을 하사받았다. 1648년(인조 26) 봄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겸임하고 병조(兵曹)로 전직되어 진휼(賑恤)을 관장하였다. 대사헌 좌참찬(左參贊)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등을 지냈으며, 죽은 후 영의정의 벼슬이 추증(追贈)되었다.
[변천]
분의정은 조선 후기의 명신 청구 임담이 우거(寓居)하면서 지은 정자이다. 나주 출신의 문인 임담이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전직되고 예조에 있을 때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자, 무주현(茂州縣)의 서쪽인 현재의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대차리 차산 마을 입구 부근에 분의정을 건립하여 산수(山水)를 논하였다고 한다. ‘분의(分宜)’는 '한산하게 지내는 것이 분수에 맞다'라는 한산내분의(閒散乃分宜)라는 의미에서, 흙집에서 밭 갈고 나무하고 베옷 입고 적게 먹고 책 읽는 그 모두가 다 본분의 일이기에 이를 통해 ‘분의’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분의정은 일제 강점기에 충청남도 금산 간 도로 개설로 인해 헐렸다.
[위치]
무주군 무주 읍내에서 남대천을 따라 서쪽으로 가면 군부대가 나오며, 군부대를 지나 500여 m 지점에 ‘차산 마을’ 이정표가 나온다. 분의정은 차산 마을 어귀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분의정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며, 분의정 터에는 차산 마을의 연혁을 알리는 석물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