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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대감과 소년 한명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1533
한자 閔大監-少年韓明澮
영어의미역 Min Minister and Young Han Myeongho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일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현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전설
주요 등장인물 민대감|한명회
관련지명 남산뜰 지도보기
모티프 유형 한명회를 사위로 삼은 민대감|민대감 덕에 출세한 한명회

[정의]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일동에서 민대감과 소년 한명회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조선 세조(世祖)[1417~1468]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사우당(四友堂)이다. 수양대군[세조]을 도와 김종서(金宗瑞)[1390~1453] 등을 제거한 후 군기녹사(軍器錄事)가 되었고,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도승지·이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다. 한명회의 일생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였는데, 모함도 많이 받았지만 무엇보다 충성심이 강하였다. 예종(睿宗) 때는 승정원에서 서정을 맡아보다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채록/수집상황]

1997년 10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일동 남산뜰에서 민병일[남, 73]이 구연한 것을 이정태가 채록하여 2005년 안산문화원에서 출간한 『반월동향리지』에 수록하였다.

[내용]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팔곡일동 남산뜰에 살고 있던 민대감은 하인을 거느리고 충청도 청주로 길을 떠났다. 때는 여름철이라 무덥고 숨이 턱에 닿았다. 민대감 일행이 청주의 어느 마을에 들어서니 큰길 가운데서 두서너 명의 소년이 놀이를 하고 있었다. 민대감 일행이 그 앞을 지나가려 하자 한 소년이 길을 막으며 “우리는 지금 대역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저리로 돌아가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민대감은 하도 기가 막혀 큰기침을 하고 되물었다. “고얀 놈들, 너희들은 지금 길을 막고 놀이를 하고 있질 않느냐?” 그러자 소년이 말하였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적의 침범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돌아서 가십시오.”

민대감은 어린아이들의 대수롭지 않은 소꿉놀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소년의 진지한 모습에 경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얘들아, 그럼 성문은 아직 못 열겠구나.” “네, 내일 아침에나 열 것입니다.” 민대감은 “그럼 돌아서 가야겠군” 하면서 샛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소년의 진지한 모습과 행동거지에 감복하여 그날은 청주에서 일박을 하기로 하였다.

주막에서 여장을 푼 민대감은 주모에게 그 아이의 내력을 물어보았다. “그 아이는 한씨 문중의 소년으로 가정이 빈곤해 늘 길에 나와 놉니다. 그러나 재주가 많고 총명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합니다. 때로는 잔꾀를 부리기도 하지만 어른들도 못 당합니다.” 민대감은 “과연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민대감은 지체가 높고 부유하게 살고는 있었으나 손이 귀하였으므로 깊은 생각을 하며 잠을 청하였다.

다음 날 민대감은 갈 길이 멀어 곧장 그곳을 떠났으나 돌아오는 길에 다시 청주 고을로 들어섰다. 그날 밤도 민대감은 같은 주막에서 여장을 풀었다. 저녁 식사 후 주안상을 차려 놓고 소년 한(韓) 군의 아버지를 불렀다. 아이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술이 거나해지자 민대감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댁의 아이를 내게 양자로 주시오.” 한씨는 처음에는 당황하는 눈치였으나 곧 집안 형편을 생각하여 민대감의 청을 들어주었다.

민대감은 그 길로 소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와 친자식처럼 돌보고 가르쳤다. 그도 그럴 것이 민대감에게는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은 영특하였고 총기가 가득하였으며, 게다가 붙임성이 좋아 사람들과 잘 사귀었다. 민대감의 집에는 화기가 넘쳐 났다.

세월이 흘러 한 군은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민대감의 부인이 한 군을 큰사위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말을 꺼냈다. 양자 삼아 데려오기는 하였으나 옛날에는 양자를 들이려면 동성동본이어야 하였고, 또 친척 가운데서 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민대감은 정성껏 키운 한 군을 남에게 빼앗기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 사위로 맞아들였다. 한 군의 친부모에게는 땅 섬지기나 사서 답례를 하였다.

민대감이 사위로 삼은 한 군은 바로 조선 세조 때의 문신인 한명회였다. 한명회세조 때의 공신이 되기까지 민대감의 노력은 대단하였다. 한명회는 처가살이를 하면서 조정에 드나들었으며, 한명회의 계략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한명회는 민대감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일개 초부로서 충청도 청주에서 생을 마쳤을 것이었다. 어렸을 때 길가에서 성 쌓기 놀이를 하다 민대감의 눈에 띄지 않았던들 역사에 남을 인물은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모티프 분석]

「민대감과 소년 한명회」의 주요 모티프는 ‘한명회를 사위로 삼은 민대감’과 ‘민대감 덕에 출세한 한명회’이다. 어린 시절 한명회의 총명함을 발견한 민대감이 한명회를 길러 사위로 삼아 한명회가 큰 출세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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