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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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潛 |
영어음역 | Yi Jam |
이칭/별칭 | 중연(仲淵),섬계(剡溪),서산(西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활동한 유생.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연(仲淵), 호는 섬계(剡溪)·서산(西山). 아버지는 이하진(李夏鎭), 어머니는 용인이씨(龍仁李氏)로 이후산(李後山)의 딸, 처는 동복오씨(同福吳氏)로 오시복(吳始復)의 딸이다. 동생이 성호(星湖) 이익(李瀷)이다.
[활동사항]
이잠은 한양 소정동(小貞洞)에서 출생하였으며 안산 첨성촌[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서 우거했다. 1675년(숙종 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된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등을 겪으면서 남인의 당색을 갖고 있던 아버지 이하진과 이들 가문이 정치적 곤경에 처하게 되자 일찍 대과(大科)를 포기하고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의 연마에 주력하였다. 정치적 실의 속에서 방랑하거나 동생 및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중 1706년(숙종 32) 한 장의 상소를 제출하였는데 이 상소로 인해 9일 동안 국문을 받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상소는 희빈장씨의 소생인 세자[후일의 경종]에 대해 노론의 송시열(宋時烈)은 세자 책봉을 지연시켰으며 김춘택(金春澤)은 세자를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지위마저도 위태롭게 하고 있고 김진규(金鎭圭)는 바로 전해에 세자가 숙종에게 진연(進宴)하는 것을 막고 있으며 또 장희재(張希載)의 언서(諺書) 내용이 지극히 흉악하고 부도한데도 어떤 신하도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등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계 여러 신하들을 거론하며 위험해진 세자를 보호해야 함을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저술 및 작품]
이잠의 시문집은 필사본으로 전하고 있는데, 국립중앙도서관에 『섬계선생유고(剡溪先生遺稿)』를 비롯해 『섬계유고(剡溪遺稿)』라는 이름으로 3종이 소장되어 있다. 또 영남대학교 도서관에는 『섬계집(剡溪集)』이라는 책이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섬계집』은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필사 연대와 필사자는 알 수 없다.
권두에 오광운(吳光運), 권도일(權道一)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시 68수, 통문(通文) 1편, 상소 1편, 부록으로 상소 3편, 연설(筵說) 1편, 고묘문(告廟文) 3편, 분황문(焚黃文) 1편, 제문 11편, 묘갈명 1편, 서(書) 1편, 유집후(遺集後) 1편, 찬(贊) 2편, 차운시 11수, 시 2수, 통문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 가운데 「복궐시구점(伏闕時口占)」은 상소문을 올릴 때에 지은 충의가 가득찬 작품이고, 칠언장편고시 「분운득관자(分韻得關字)」는 이잠의 인생관을 서술한 작품이다. 또 「산거즉사삼십운(山居卽事三十韻)」은 자기의 궁핍한 살림을 묘사하고 관리들의 호사스러운 생활과 백성들의 피폐된 모습을 대립시켜 놓았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었으나 뒤에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로 이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이잠 사후 1년이 지난 1707년(숙종 33) 10월 11일 수찬 김세흠(金世欽)이 상소하여 이잠과 그의 상소를 평하여 “이잠은 전하를 위해 말하고 동궁을 위해 죽으며 그 몸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죽어도 썩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사후 16년 만인 1722년(경종 2) 신원되고 집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