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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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弘道 |
영어의미역 | Gim Hongdo |
이칭/별칭 | 사능(士能),함장(含章),단원(檀園),단로(檀老),단옹(檀翁),단구(丹邱 또는 丹丘),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 또는 醉畵史 또는 醉畵師),첩취옹(輒醉翁),농한(農漢),농사옹(農社翁),대우암(對右菴),오수당(午睡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우석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화가.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사능(士能)·함장(含章), 호는 단원(檀園)·단로(檀老)·단옹(檀翁)·단구(丹邱, 丹丘)·서호(西湖)·고면거사(高眠居士)·취화사(醉畵士, 醉畵史, 醉畵師)·첩취옹(輒醉翁)·농한(農漢)·농사옹(農社翁)·대우암(對右庵)·오수당(午睡堂). 증조부는 만호를 지낸 김진창(金震昌), 할아버지는 김수성(金壽星), 아버지는 김석무(金錫武)이다. 처는 성씨는 알 수 없으나 선대가 역관·서리를 지낸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외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산수화와 화조도를 잘 그린 화가이다.
[활동사항]
김홍도는 현재의 경기도 안산시에서 성장하여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이 안산에 거주할 때 그림 지도를 받았다. 안산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화가 김홍도가 성장하는 데에는 18세기 안산이 지녔던 독특한 문화적 힘이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당시 안산은 노론(老論)과의 당쟁을 피해 물러난 남인(南人), 소북(小北)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다.
실학사상의 대가 성호 이익(李瀷)[1681~1763], 문단의 거장인 이용휴(李用休)[1708~1782],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허필(許佖)[1709~1768], 강세황의 처남이자 안산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진주유씨 유경종(柳慶種)[1714~1784]과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유경종은 조부인 이조판서 유명현(柳命賢)[1643~1703]의 고향집을 물려받아 오교장(午橋莊)을 마련하여 현재의 부곡동에 안산 문화계의 사랑방을 제공하였다.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인물들은 안정복(安鼎福)[1712~1791], 신광수(申光洙)[1712~1775], 채제공(蔡濟恭)[1720~1799], 목만중(睦萬中)[1727~?] 등 각계의 내로라 하는 인사들이었다. 김홍도는 이러한 안산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로서 기틀을 닦으며, 스승 강세황의 지도를 받고 이용휴로부터 감화받았다.
김홍도의 초기 호인 서호(西湖)는 안산의 첨성리[현 안산시 상록구 일동] 앞바다의 명칭이기도 하다. 21세 때인 1765년(영조 41)을 전후부터 도화서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해 경현당(景賢堂)에서 수작(受爵)했던 행사를 그린 「경현당수작도(景賢堂受爵圖)」의 병풍 제작에 참여하였다.
28세 때인 1772년 6월 『영희전중수의궤(永禧殿重修儀軌)』의 그림 제작에 참여하였고, 11월에는 변상벽(卞相璧) 등과 함께 존호도감(尊號都監)에 소속되어 어람용 반차도(班次圖)를 그렸다. 다음해 영조의 어진과 정조의 왕세손 시절 초상 작업에 동참화사(同參畵師)로 참여하였다. 1774년(영조 50)에는 장원서별제에서 사포서별제로 전보되었고, 그해 스승 강세황이 사포서별제가 되어 함께 근무하였다. 1781년(정조 5)에는 정조의 어진 초상 작업에 동참화사로서 참여하여, 그 공로로 1783년 경상도 안기찰방(安奇察訪)에 제수되었다.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아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 등 영동 일대를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다. 다음해 동지정사(冬至正使)인 이성원(李成源)의 군관 직함을 갖고 이명기(李命基)와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790년에는 현륭원(顯隆園)의 능침 사찰인 용주사(龍珠寺)의 불탱 작업을 주관 감동하여 그 공로로 정6품 사과(司果) 벼슬에 임용되었다.
1791년에는 정조의 원유관본(遠遊冠本) 어진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였고, 그 공로로 그해 충청도 연풍현감(延豊縣監)에 제수되어 만 3년간 근무하였다. 1795년 정조의 현륭원 원행을 그린 「원행을묘의궤도(園行乙卯儀軌圖)」 8폭 병풍을 완성하였다. 1800년 김홍도의 최대 후원자였던 정조가 승하하였다. 60세 때인 1804년(순조 4) 규장각차비대령화원(奎章閣差備待令畵員)에 차정되기도 하였다. 1805년 크게 질병을 앓았고 12월 「추성부도(秋聲賻圖)」를 마지막 작품으로 하여 다음해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홍도는 그림의 기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용모도 뛰어나고 인품과 정신까지 고상했던 것으로 전한다. 예컨대 조희룡은 「김홍도전(金弘道傳)」에서 “단원이 긍재(兢齋)[김득신], 호생관(毫生館)[최북],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이인문] 사이에서 홀로 독보적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러므로 인품이 높아야 그 필법도 높다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아름다운 풍채에 도량이 크고 넓어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신선과 같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은 「단원기(檀園記)」에서 “그 기예가 막 바로 옛사람을 좇을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풍채와 정신이 우뚝하니 멀리 빼어나서 진나라, 송나라의 훌륭한 선비 중에나 그 짝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정조는 김홍도를 총애하여 30여 년간 궁궐의 회사(繪事)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강세황은 김홍도를 우리나라 금세의 신필(神筆)로 칭송하였다.
[학문과 사상]
김홍도의 화풍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전기에는 당시의 남종화풍과 도화서의 전통적 북종화풍을 절충한 화풍을 드러냈으며, 후기에는 문인적 필묵법과 우리나라 자연의 사생을 통해 넓은 공간감과 한국적 시정이 넘치는 현실적 화풍을 형성하였다. 만년에는 거칠고 생략적인 필치를 구사하여 생활 주변의 풍경을 표현하였다.
김홍도는 한국 회화사에 있어 정선(鄭歚)과 심사정(沈師正)의 전통을 잇는 한편, 금강산 사생이나 영모(翎毛)·화조(花鳥)의 사생을 통해 우리 취향에 맞는 화풍을 창안해 냈다. 김홍도의 화풍은 신윤복(申潤福), 김득신, 이명기(李命基), 이재관(李在寬), 이수민(李壽民) 등 동료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조선 후기 화단에 널리 확산되었다.
[저술 및 작품]
대표작 회화 작품집으로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단원화첩(檀園畵帖)』·『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해산첩(海山帖)』 등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서원아집도육첩병풍(西園雅集圖六帖屛風)」·「무이귀도도(武夷歸棹圖)」·「선인기려도(仙人騎驢圖)」·「단원도(檀園圖)」·「군선도병(群仙圖屛)」·「마상청앵도(馬上聽鶯圖)」 등이 있다. 또 자필 서첩(書帖)으로는 『단원유묵첩(檀園遺墨帖)』이 있다.
[상훈과 추모]
안산시에서는 1999년부터 단원미술제를 개최해 오다가 2008년부터 종합 축제인 단원예술제로 명칭을 변경하여 김홍도의 예술혼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