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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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溫陽新市街地形成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형열 |
[정의]
일제강점기 충남선 개통과 온양온천의 개발에 따른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현재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1~6동]의 근대적 신시가지로의 환경 변화.
[개설]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아산군에 존재했던 온양면(溫陽面)은 지금의 아산시 온양1~6동 일원이다.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아산, 온양, 신창 3개 군(郡)이 아산군으로 통합되었고, 온양면에 아산군청·온양경찰서·공주지방법원 온양출장소 등이 설치되면서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또한 1922년 충남선(忠南線)[지금의 장항선]의 일부 구간인 천안-온양온천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1926년 경남철도주식회사(京南鐵道株式會社)가 온양온천 운영권을 인수한 뒤, 신정관(神井館)을 신축하는 등 근대적 신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역사적 배경]
온양면은 일제강점기 전후로 온양온천주식회사(溫陽溫泉株式會社)가 설립되는 등 일본인 거주자의 수가 증가하였다. 1919년 9월 사설(私設) 경남철도주식회사가 천안역을 기점으로 하여 전라북도 군산에 이르는 구간과 충청남도 천안에서 경기도 안성까지 연결되는 충남선 철도 부설 허가권을 받았다. 1922년 천안-온양온천 구간이 개통되면서 아산 지역에도 기차가 들어오게 되었고, 1931년 전 구간 연결이 완성되었다. 또한 경남철도주식회사가 1926년 온양온천의 운영권을 인수하면서 신정관의 건축과 신정호(神井湖) 인근을 유원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경과]
철도 부설과 온양온천의 활성화로 온양면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증가 추세가 비교적 빠르게 나타났다. 온양온천 인근의 경우 1913년 일본인 가구와 인구가 34가구 109명이었던 것이 1933년 82가구 371명이 되었다. 1922년에는 아산군청도 영인면 아산리에서 온양면 온천리로 이전하였다. 한편 아산 내에서 일본인 거주자의 온양면 집중 현상도 나타났다. 1928년 기준으로 군내(郡內) 일본인 가구와 인구는 214가구 824명이었는데, 온양면이 131가구 547명을 차지하였다. 전체 일본인 거주자 가운데 약 66%가 온양면에 거주한 것이다.
이와 함께 거리의 풍경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행정기관과 함께 일본인 소유의 주택, 여관, 상점 등이 온천리를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밤늦게까지 전등불이 꺼지지 않았고, 전화를 가설한 세대도 1928년 기준으로 43세대에 이르렀다. 또한 상업에 있어서도 과거 물길을 이용할 때 교역이 활발했던 선장시장(仙掌市場)에 비해 온양시장(溫陽市場)의 역할이 커졌다.
[결과]
온양면의 근대적 신시가지 형성은 조선시대 이래 아산, 온양, 신창 세 지역에 형성되었던 중심지가 온양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개발의 이면에 소비 유흥도시로서의 성격이 더욱 부각되었다.
[의의와 평가]
온양 신시가지 형성은 주로 일본인 거주자들의 이익을 대변했으며, 아산 내에서 도시와 농촌의 분리가 분명하게 나타나면서 지역 균형 발전에 한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