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09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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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谷書院 |
영어공식명칭 | Geumgokseowon Confucian Academy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여송은 |
건립 시기/일시 | 1837년 4월 20일 - 금곡서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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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871년[추정] - 금곡서원 훼철 |
원소재지 | 금곡서원 -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서원골] |
성격 | 서원 |
[정의]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중리 서원골에 있던 조선 후기의 사설 교육기관.
[개설]
금곡서원(金谷書院)은 맹사성의 부친 동포(東浦) 맹희도(孟希道)를 제향하던 사우이다. 1837년 4월 20일에 동포 맹희도의 옛집에 창건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71년 훼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맹희도는 본관이 신창이며 고려 말의 신진사대부이자 성리학자였다. 1365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한림학사, 수문전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정몽주, 길재, 권근 등과 교유하였으며 위화도회군 이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도 한산에 은거하다가 3년 뒤 온양 금곡동으로 들어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맹희도는 아산 지역에 성리학을 처음 전파한 인물로 평가된다.
[위치]
금곡서원의 위치에 대해서는 확실한 사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열읍원우사적(列邑院宇事蹟)』에 금곡서원을 맹희도의 옛집에 세웠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맹씨행단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변천]
금곡서원에 대해서는 『서원가고(書院可攷)』, 『동국원우록(東國院宇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열읍원우사적』에 「충청도온양군금곡서원사실(忠淸道溫陽郡金谷書院事實)」이 등재되어 있다. 이것은 서원의 창건 연대가 후기이기 때문이다. 『열읍원우사적』을 바탕으로 금곡서원에 관하여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금곡서원은 동포 맹희도를 제향하던 사우이다. 맹희도는 여말 두문동 72인 중의 한명으로서 1388년에 관직을 버리고 서천 한산에 은거하다가 1392년에 온양의 금곡촌(金谷村) 오봉(五峰)의 아래에 있는 작은 계곡 옆에 일실(一室)을 걸고 은둔하였다. 맹희도가 죽은 후 후학들은 맹희도의 유풍을 경모하여 자하의 왼쪽 산록에 사우를 세우고 ‘자하사(紫霞祠)’ 또는 ‘오봉사(五峰祠)’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사우의 왼쪽에 점토동(店土洞)이 있어 그 지명의 음이 ‘정퇴(靜退)’와 서로 가까워 1634년 시암(時庵) 조상우(趙相禹)의 주도로 정퇴서원(靜退書院)이 창건되었다.
정퇴서원은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배향하기 위한 서원이었으나 맹희도의 사우가 바로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맹희도만을 별향하기가 미안하여 맹희도와 조광조, 이황을 병향하여 모두 주벽으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서원을 창건한 시암 조상우와 아들 매곡 조이후가 추배되자, 시암 조상우의 후손들은 "시암과 매곡이 정암과 퇴계에게 배향되는 것은 가하지만 동포에게 배향되는 것은 불가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동포를 정암과 퇴계의 배위에 안치하기까지 하였다. 이 위차 문제는 당시 아산 지역의 사림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그 논란은 동포 맹희도의 위판을 서일위(西一位)로 할 것이냐 동삼위(東三位)로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당시 온양의 유림들은 이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선 1767년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에게 서원 원유의 명의로 의견을 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윤봉구는 연대에 따른 위차를 정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은 듯하며 1790년에는 관찰사에게 소를 올리고 예조에도 상언하였다. 이에 대해 관찰사의 제사와 예조의 회계는 연대에 따른 위차 배열이 원칙이라고 하면서도, 사액 서원이 아닌 정퇴서원의 문제가 조정에까지 비화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향전(鄕戰)으로까지 인식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온양의 유림들은 1836년에 성균관에 다시 통문을 보내어 맹희도를 정퇴서원에 제향하지 말고 정퇴서원이 건립되기 이전대로 독향(獨享)하라는 태학의 답통(答通)을 받아내었다. 그리하여 1837년 4월 20일에 동포 맹희도의 옛집에 서원을 세우고 ‘금곡서원’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금곡서원이 건립된 이후의 연혁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알 수 없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 금곡서원도 정퇴서원과 함께 훼철된 것으로 추측된다.
[형태]
금곡서원의 형태에 대하여는 확인되는 사실이 없다.
[현황]
금곡서원이 철폐된 이후 맹희도의 위패는 세덕사(世德祠)에 봉안되었다. 세덕사에는 맹희도의 부친 맹유(孟裕), 아들 맹사성(孟思誠)의 위패도 함께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10월에 제향을 올린다.
[의의와 평가]
금곡서원은 맹희도을 배향했던 소규모의 서원이었다. 금곡서원의 건립 과정을 통해 조선 후기 서원 건립 및 배향과 관련된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