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101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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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儒敎 |
영어공식명칭 | Confucianism |
이칭/별칭 | 유학(儒學),공자교(孔子敎)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아산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교빈 |
[정의]
충청남도 아산 지역과 관련된 유교 지식인의 학문·사상·활동 및 문화유적.
[개설]
충청남도 아산은 애국과 충절로 뛰어난 선비의 고장이다. 고려 말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들판과 산이 어우러지며, 바닷길도 가까운 지리적 특성 때문에 낙향하여 은거하는 선비들이 들어와 맹사성(孟思誠)과 김질(金秩)처럼 이곳을 입향조로 삼은 집안들이 나왔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영남학파와 기호학파가 나뉘면서 아산은 기호학파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이 무렵 아산을 대표한 인물로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李舜臣)과 홍가신(洪可臣), 아산현감을 지낸 이지함(李之菡)과 도고에 은거했던 조익(趙翼), 산림처사로 이름난 박지계(朴知誡) 등이 있으며, 특히 송악면 외암리 출신의 이간(李柬)은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화두였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논쟁에서 동론(同論)을 주장한 핵심 인물이었다. 이러한 흐름이 오늘날까지도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도회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물]
맹사성[1360~1438]은 최영 장군의 손주사위이며 조선 초 명재상이자 청백리이다. 신창맹씨의 온양 입향조로 구주정(九柱亭)에는 맹사성·황희·허조 등 삼정승이 함께 심었다는 괴목이 있다. 김질[1364~1454]은 김녕김씨 아산 지역 입향조이며, 고려가 망하자 절의를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김구(金鉤)[1381~1462]는 1459년(세조 5) 폐지된 아산현의 복현(復縣)에 힘썼고, 경사(經史)와 주자학에 정통하였으며, 성균관에서 후진 교육에 애쓴 까닭에 김말(金末), 김반(金泮)과 더불어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렸다. 장영실[?~1442]은 아산이 본관이며, 측우기·자격루 등의 발명을 통해 우리나라 과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주면 아산장씨 시조묘 옆에 가묘가 있으며, 아산시가 장영실을 기념하여 아산장영실과학관을 세웠다.
기준(奇遵)[1492~1521]은 기대승의 조카로 기묘사화 때 희생되었으며, 인산서원에 모셔졌다. 이지함[1517~1578]은 서경덕의 제자로, 의학·천문·지리 등에 뛰어났으며, 아산현감을 지내면서 걸인청을 만들어 사회적 약자들을 구제하였고 인산서원에 모셔졌다. 홍가신[1541~1615]은 서경덕의 문인 민순(閔純)의 제자이며, 임진왜란 때 공이 커서 불천위(不遷位)[예전에, 큰 공훈이 있어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神位)]가 되었고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모셔졌다.
이순신[1545~1598]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웅으로, 음봉에 묘소가 있으며, 숙종 때 세운 현충사(顯忠祠)에 모셔졌다. 박지계[1573~1635]는 예학에 뛰어난 대표적인 산림처사로 조상우, 조익 등과 정퇴서원을 건립하였고, 인산서원에 모셔졌다. 조익[1579~1655]은 광해군 때 벼슬에서 물러나 15년 이상 도고에 살았으며, 도산서원(道山書院)에 모셔졌다. 조상우(趙相禹)[1582~1657]는 김장생·장현광의 문인으로, 박지계·조익·송준길·김집 등과 교류하였고, 정퇴서원을 세워 아산 지역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극선(趙克善)[1595~1658]은 박지계와 조익의 문인이며 성리학과 예설에 밝았고, 신창의 도산서원에 모셔졌다. 이간[1677~1727]은 율곡의 학문을 이었으며, 남당 한원진과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을 벌이면서 동론을 주장하는 낙론(洛論)의 중심이 되었다.
염치읍 출신 풍천임씨들로는 임홍량(任弘亮)[1634~1707]과 임홍망(任弘望)[1635~1715], 임형(任泂)[1660~1721], 임징하(任徵夏)[1687~1730], 임창(任廠)[1652~1723],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스승인 임헌회(任憲晦)[1811~1876] 등이 유명하다. 김옥균[1851~1893]은 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과 국정을 개혁하고 낡은 폐습을 타파하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일본에서 살해되었으며, 영인면에 묘소가 있다.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아산에서 태어나 미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조선 말기 정치가로 활약하였으나, 아쉽게도 친일 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시설]
충청남도 아산에는 향교 3곳, 서원 8곳, 사우 3곳, 정려 23곳, 신도비 7개 등이 있다. 향교로는 아산향교·온양향교·신창향교 등이 있으며, 세 곳 모두 대성전과 명륜당을 갖추고, 봄·가을 석전대제와 매월 두 차례 분향을 올린다.
배방읍 중리의 정퇴서원은 1634년에 세워졌으며, 정암 조광조와 퇴계 이황을 모셨고 뒤에 맹희도와 홍가신을 추배하였다. 염치읍 서원리의 인산서원은 1610년에 세워졌으며,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모셔서 ‘오현서원’이라고도 불렀다. 홍가신·박지계·이지함·기준 등이 추가로 모셔졌지만, 1871년 철폐되어 터만 남았다. 도고면 도산리의 도산서원은 1670년 조익을 모시기 위해 세웠으며 고종 때 철폐되었다가 최근 후손들이 예산으로 옮겨갔다. 송악면 강당리의 외암서원(巍巖書院)은 지금의 강당사(講堂寺)이다. 1707년 이간이 강학하는 관선재(觀善齋)로 시작하여 이간을 배향하면서 외암서사로 바꾸었고, 서원 철폐령을 피하기 위해 강당사라는 절로 바꾸면서 공주 마곡사의 불상을 모셔온 것으로 알려졌다. 염치읍 동정리의 독성서원(獨醒書院)[독성서사]은 1858년 임창과 임징하를 배향하면서 만든 풍천임씨 집안 서원이었으나, 대원군 때 철폐되었다가 2004년에 중건하였다. 배방읍 중리의 금곡서원(金谷書院)은 정퇴서원에 모셨던 맹희도의 위패를 옮겨 모시기 위해 1837년에 건립되었으나,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 현충사는 1706년 유생들이 뜻을 모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사액(賜額)하였으며, 1932년 중건되었고 1960년 성역화되었다.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 놓은 본전을 비롯하여 『난중일기』 등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관아 건물로는 읍내동의 온주아문 및 동헌이 있는데, 아문은 1871년에 다시 지은 것이고 ‘온주’라는 명칭은 신라 때 호칭에서 온 것이다. 영인면 아산리에 남아 있는 여민루(慮民樓)는 관아 입구에 세웠던 다락 형식의 문이다. 온천동의 영괴대(靈槐臺)는 영조의 행차를 따라온 사도세자가 무술을 연마하던 곳에 온양군수가 느티나무 세 그루를 심었고, 뒷날 정조가 건물을 지으면서 이름과 글씨를 내린 것이다.
배방읍 중리의 맹씨행단(孟氏杏壇)은 맹사성이 살던 집으로, 본래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며, 일반 백성이 살던 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다. 외암마을은 송악면 외암리에 자리한 예안이씨 마을로서, 외암 이간의 생가인 아산 건재고택(健齋古宅), 참판댁, 송화댁 등 양반 주택과 50여 호의 초가가 남아 있다. 그 밖에 도고면 시전리의 성준경 가옥(成俊慶家屋), 영인면의 김옥균유허(金玉均遺墟), 홍만조를 모신 자은영당(自隱影堂) 등 많은 유물과 유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