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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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종원 |
[정의]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남도 보령시의 역사.
[개설]
보령은 원삼국 시대 만로국(萬盧國), 또는 소위건국(素謂乾國)이 자리했을 것으로 비정(比定)되지만 그 실체는 분명하지 못하다. 백제 시대에는 사비기(泗沘期)를 전후하여 방군성제(方郡城制)가 실시됨에 따라 설림군[서천]의 영현(領縣)인 사포현과 결기군[결성]의 영현인 신촌현으로 편제되었다. 고려 시대에 양광도로 편제된 보령은 보령현과 남포현의 2개 현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에 속하였으며, 남포현은 공주목, 보령현은 홍주목의 영현으로 편제되었다. 1895년의 지방 관제 개편에 따라 남포현과 보령현은 각각 군이 되어 홍주부의 관할이 되었다. 1896년 부제는 다시 13도제로 개편되었으며, 보령군과 남포군은 공주 관할에 놓였다. 그리고 오천의 충청수영은 폐지되었다가 1901년 오천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보령 지역의 3개 군은 보령군으로 통합되었다.1986년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면서 보령군과 대천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이 보령시로 통합되었다.
[고대]
보령의 고대사는 원삼국 시대와 삼국 시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원삼국 시대 보령 지역에는 만로국, 또는 소위건국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비정되지만 그 실체는 불분명하다. 다만 고분과 환호(環濠) 유적 등을 통해 문화상이 확인된다. 보령 지역은 4세기 중엽에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되었다. 백제의 영역으로 편제된 이후 보령 지역에는 중앙의 지배력이 미쳤지만 한성기(漢城期)에는 재지(在地) 세력을 통한 간접 지배가 이루어졌다. 475년 웅진천도 이후 보령 지역의 지리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웅진기(熊津期)에는 지방 통치 제도로 담로제(檐魯制)가 시행되었으나 보령 지역이 담로(檐魯)[백제 시대의 지방 행정 구역]로 편제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그렇지만 5세기 후반의 석실분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중앙 세력의 침투 사실은 확인된다.
기록을 통해 보령 지역이 중앙의 직접적인 지배 체제에 편제된 시기는 사비기로 확인된다. 이때 지방 통치 체제로는 방군성제가 시행되었는데, 성(城)은 현(縣)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된다. 보령 지역은 설림군[서천]의 영현인 사포현과 결기군[결성]의 영현인 신촌현으로 편제되었다. 사포현은 설림군의 영현 가운데 하나였으며, 보령시 남포면·웅천읍 일대에 설치되었다. 중심 치소(治所)는 웅천읍 수부리 수안마을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신촌현은 결기군의 영현 가운데 하나였다. 중심지는 주포면 보령리 구성재 부근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 ‘신촌(新村)’ 명의 기와편이 확인되었다. 사촌(沙村)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그리고 사포현의 중심에서 동북쪽으로 성주사(聖住寺)의 전신인 오합사(烏合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백제 말기인 655년(의자왕 15)에는 붉은 말이 오합사에 들어가 울면서 법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고 하여, 백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이변 현상이 일어났다. 나당군이 백제를 멸한 후 663년에 백제 고지를 1도독부 7주 51현으로 편제하였는데, 이때 보령 지역은 도독부의 직할 영역으로 산곤현(散昆縣)과 매라현(邁羅縣)이 두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중 신촌현 지역은 산곤현으로 비정된다. 통일 신라기인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 대 신읍현(新邑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시대·조선 시대]
고려 시대에 양광도로 편제된 보령 지역은 보령현과 남포현의 2개 현이 설치되었다. 남포현은 신라 웅주(熊州) 서림군[서천군 서천읍]의 영현의 하나였으나 1018년(현종 9) 가림군[부여군 임천면]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현재의 보령시 남포면 양기리 일대이다. 보령현은 본래 백제의 신촌현이 신라 경덕왕 대 신읍현으로 고쳤던 것을 고려 초에 개칭한 것이다. 1018년에 홍주의 속현이 되었지만 예종(睿宗)[재위: 1105~1122] 대 고을 사람들이 유망(流亡)하자 중앙에서 지방관을 직접 파견하여 다스렸다. 보령현의 위치는 현재 보령시 주포면 지역이며, 치소는 보령리 구성재에 비정된다.
군현 이외에 특수 행정 구역으로 향·소(所)·부곡(部曲)을 두었다. 보령 지역에는 부곡으로 현하부곡[대천]·보원부곡[청라]·금신부곡[오천]이 있었으며, 소로는 박평소[미산]·횡천소[미산]·건자산소[청소] 등이 있었다.
보령 지역은 서해 항로상에 자리하고 있어 조운로(漕運路)를 비롯해 관방(關防)의 요충지였다. 그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무력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대몽항쟁 과정에서는 삼별초가 고란도(孤蘭島) 부근에서 전함 6척을 소각시키고, 조선소(造船所)를 기습하여 일본 정벌 병력과 물량 운송을 위해 건조 중이던 전함을 파괴하였다. 이때 홍주부사 이행검(李行儉)[1225~1310]과 함께 결성과 남포의 감무가 잡혀가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380년(우왕 6)에는 남포현이 왜구의 침략을 받았으며, 1381년(우왕 7)과 1388년(우왕 14)에는 왜구가 보령현에 침략하여 백성들이 유망하고 농토가 황폐화하였다. 이에 1390년(공양왕 2)에 처음으로 남포현에 진성(鎭城)을 설치하였다.
조선 시대에 보령 지역은 충청도에 속하였으며, 남포현은 공주목, 보령현은 홍주목의 영현으로 편제되었다. 세종(世宗)[재위 1418~1450] 때까지 보령현은 홍주목, 남포현은 공주목 소속이었다. 세조(世祖)[재위: 1455~1468] 초에 진관(鎭管) 체제가 실시되고 전국의 요새지에 15개 진을 설치하면서 충청도에도 5개 진관을 두었는데, 보령 지역은 홍주 진관에 속하였다. 남포현은 1397년(태조 6)에 병마사겸판현사(兵馬使兼判縣事)를 두었다가 1466년(세조 12)에는 진을 혁파하고 현감으로 하였다. 보령현은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두었고, 1652년(효종 3)에는 도호부로 승격시켜 수군절도사겸부사(水軍節度使兼府使)를 두었다가 1655년에 다시 현으로 강등시켰다.
세종 대에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보령읍성과 남포읍성을 축조하였으며, 새로운 치소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1467년(세조 13)에는 대회이포[오천]에 충청도수군절도사영을 설치하였다. 최초의 충청수영은 태조 때 고만(高巒)에 설치되었다가 오천으로 옮겨졌다.
교육 기관으로는 남포향교와 보령향교가 있었고 조선 말기에는 충청수영 지역에 오천군이 신설되면서 오천향교가 세워졌다. 보령현 청라에 있는 화암서원(華巖書院)은 이지함(李之菡)·이산보(李山甫)·이몽규(李夢圭) 등 3인을 모신 곳으로 1610년(광해군 2)에 건립하여 1686년(숙종 12)에 사액되었다. 남포현에는 1797년(정조 21)에 신안사가 설립되었으나 얼마 후 훼철(毁撤)되었다가 1807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근현대]
1895년의 지방 관제 개편에 따라 남포현과 보령현은 각각 군이 되어 홍주부의 관할이 되었다. 1896년 부제는 다시 13도제로 개편되었으며, 보령군과 남포군은 공주 관할에 놓였다. 그리고 오천의 충청수영은 폐지되었다가 1901년 오천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보령 지역의 3개 군은 보령군으로 통합되었다. 남포 지역은 1895년 을미의병(乙未義兵) 운동 때 김복한·이설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홍주의병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는 주산의 주렴산과 청소·주포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1986년 대천읍이 대천시로 승격되면서 보령군과 대천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 1995년 대천시와 보령군이 보령시로 통합이 되었다. 현재 보령시는 16개 구역[웅천읍, 주포면, 주교면, 오천면, 천북면, 청소면, 청라면, 남포면, 주산면, 미산면, 성주면, 대천1동, 대천2동, 대천3동, 대천4동, 대천5동]으로 나뉘어 행정과 시정이 이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