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22
한자 慶州金氏旌閭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용서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류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887년연표보기 - 경주 김씨 정려 건립[김응종과 김응종의 처 전주 이씨]
건립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 경주 김씨 정려 건립[김응규와 김응규의 처 부령 김씨]
현 소재지 경주 김씨 정려 -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용서리지도보기
성격 정려각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김응규 정려각]|홑처마 팔작지붕[김응종 정려각]
정면 칸수 1칸[김응규 정려각]|1칸[김응종 정려각]
측면 칸수 1칸[김응규 정려각]|1칸[김응종 정려각]
소유자 경주 김씨 문중
관리자 경주 김씨 문중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용서리에 있는 개항기 정려각.

[개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충효 사상과 정절을 으뜸으로 삼았다. 조정에서도 이를 적극 권장하여, 충효열(忠孝烈)에 뛰어난 사람을 뽑아 정려(旌閭)를 내려 백성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정려의 종류에는 정려비와 정려문, 정려각 등이 있다. 경주 김씨 정려(慶州金氏旌閭)는 개항기에 경주 김씨(慶州金氏) 가문의 효자 김응규(金應圭)와 김응규의 처 열녀 부령 김씨(扶寧金氏), 효자 김응종(金應鍾)과 김응종의 처 열녀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정려각의 주인공들은 부안군의 경주 김씨 가문에서 배출한 두 쌍의 효자 열녀 부부로 유명하다. 김응규의 본관은 경주, 호는 성암(誠庵)이다. 김세백(金世伯)의 7세손이다. 집이 가난하여 짚신을 삼아 부모를 봉양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김응규의 처 부령 김씨도 시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였다. 이에 1894년(고종 31) 조정에서 김응규에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하였으며, 부인과 함께 정려의 포상을 내렸다.

김응종의 본관은 경주, 자는 응어(應魚), 호는 죽은(竹隱)이다. 군수 김치(金致)의 후손이다. 병든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병이 위독하자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부모의 목숨을 수일 동안 연명하게 하였다. 김응종의 처 전주 이씨는 김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효녀로 이름이 났다. 남편이 병들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남편에게 마시게 하여 3일간 연명하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진주 이씨는 곡기를 끊고 죽으려고 하였으나 자손들의 만류로 중지하였다. 그 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1887년(고종 24)에 김응종과 부인 전주 이씨에게 정려가 내려졌으며, 김응종에게는 사헌부 감찰의 증직을 내렸다.

[위치]

경주 김씨 정려부안군 상서면 용서리 지석마을에 있다. 부안군 상서면 고인돌로 45-21[용서리 132번지] 영모재(永慕齋) 앞에 자리한다.

[변천]

1887년에 효자 김응종과 김응종의 처 열녀 전주 이씨에게 정려가 내려졌으며, 1894년에는 효자 김응규와 김응규의 처 열녀 부령 김씨에게 정려가 내려졌다.

[형태]

경주 김씨의 재실 영모재 아래쪽 붉은 벽돌의 담장 안에 두 부부의 정려각이 좌우로 나란히 있다. 정려각은 각각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각 정려각 안에는 부부의 정려 현판이 2개씩 있다. 왼쪽의 김응규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형태로, 그 안에 2개의 정려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현판의 명문은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김응규지려 당저삼십일년갑오명정(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金應圭之閭 當宁三十一年甲午命旌)’, ‘열녀 증숙인 부령김씨지려 당저삼십일년갑오명정(烈女 贈淑人 扶寧金氏之閭 當宁三十一年甲午命旌)’이다. 오른쪽의 김응종 정려각도 김응규 정려각과 똑같은 형식으로 지어졌는데, 역시 그 안에 2개의 정려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현판의 명문은 ‘효자증통훈대부사헌부감찰김응종지려 당저이십사년정해사월일 명정(孝子贈通訓大夫司憲府監察金應圭之閭 當宁二十四年丁亥四月日命旌)’, ‘열녀 증숙인 전주이씨지려 당저이십사년갑정해사월일명정(烈女 贈淑人 全州李氏之閭 當宁二十四年甲丁亥四月日命旌)’이다.

[현황]

두 정려각은 경주 김씨 문중이 소유하여 관리하고 있다. 벽돌 담장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경주 김씨 재실이 있어서 비교적 관리가 잘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9세기 이후의 조선에서는 전국적으로 효자와 열녀들에 대한 정려 발급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고종 연간에 정부에서 허가한 정려의 수는 엄청나게 늘어나서 남발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충효열에 대한 정부의 포상책이 빈곤한 재정을 메우기 위한 보충 수단으로 전락한 데 그 원인이 있었다. 또한 가문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금전을 동원해서라도 정부로부터 정려를 받아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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