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393
한자 古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고대
집필자 강종원

[정의]

초기 국가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부여 지역의 역사와 문화.

[초기 국가 시대]

부여 지역에는 마한의 소국인 고포국(古蒲國)이 있었던 것으로 비정된다. 원삼국 시대 유적으로는 증산리 유적에서 주구묘 14기가 확인되었으며, 가중리 유적에서 7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쌍북리 두시럭골 유적에서는 덧널무덤과 원형 수혈유구들이 조사되었고, 가탑리 유적에서는 널무덤과 독무덤이 조사되었다. 가탑리 가탑들 유적에서는 주거지·수혈유구 등이 조사되었다. 그 외에도 부여 송국리 유적 목책 시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격자 타날된 토기편이 출토되어 원삼국 시대 주거지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구룡면 죽교리·양화면 시음리·오량리·족교리·장암면 원문리 등 10여 개소에서 격자문과 승문이 타날된 토기 파편 등이 수습된 바 있어 취락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 부여는 백제의 영역이었다. 부여 지역이 백제에 편입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4세기 중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웅진 천도 이후 부여 지역은 왕도의 배후 도시로서 성장하였으며, 동성왕 대에는 왕도의 후보지로 부각되었다. 동성왕은 490년(공성왕 12)과 501년(동성왕 23) 3차례에 걸쳐 사비 지역으로 전렵을 나갔는데, 사비 지역으로의 천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웅진 도읍기에 각종 수공업 생산 시설을 부여 지역에 조영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여 정동리 A지구 가마에서 출토된 ‘대방(大方)’, ‘중방(中方)’의 명문과 같은 종류의 명문전과 문양전이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사비 지역에서 물품을 생산하여 조달하였음을 보여 주며, 부여 지역이 웅진 왕도의 배후 도시로 경영되었음을 알려 준다.

538년(성왕 16) 성왕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성왕은 천도에 앞서 부소산성을 비롯하여 나성 등 왕도 관련 기반 시설을 조성하였으며, 도성 내부는 정연한 가로 구획과 함께 5부·5항의 계획적인 도성제가 시행되었다. 위덕왕은 567년(위덕왕 14) 성왕을 위한 원찰로 능사를 창건하였으며, 577년에는 죽은 왕자를 위하여 왕흥사를 창건하였다. 이후 왕흥사법왕무왕 대 중창을 거쳐 완성되었다. 무왕은 630년 사비의 궁궐을 중수하였으며, 634년에는 궁의 남쪽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부여는 사비기에 6명의 왕이 재위하고, 120여 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사비성이 함락되고 멸망의 운명을 맞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는 백제 고토를 지배하기 위하여 사비성에 백제도호부를 설치하였으나 661년 폐지되었고, 사비 지역은 웅진도독부의 관할에 놓였다. 그 후 671년(문무왕 11) 신라가 사비 지역을 차지하여 소부리주를 설치하였으며, 672년 총관을 두었다. 686년(신문왕 6) 사비주를 군으로 삼았으며, 757년(경덕왕 16)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면서 부여를 속군으로 하였다. 석산현(石山縣)·열성현(悅城縣) 등이 부여군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부여는 신라 통일 이후 경덕왕 대 부여군(扶餘郡)으로 개칭되었다. ‘부여’ 명칭이 된 것은 통일 신라 시기부터이다. 부여군 이외에 가림군, 한산현, 석산현도 변화하였다. 석성은 백제 때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통일 신라 때 석산(石山)이라 고쳐 부여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임천은 백제 때 가림군으로서 통일 신라 때에 가림(加林)에서 가림(嘉林)으로 고쳤으며, 홍산은 백제 대산현(大山縣)인데 통일 신라 때 한산(翰山)으로 고쳐 가림군의 속현으로 하였다.

[후삼국 시대]

충청남도 지역은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접경지여서, 양대 세력의 각축 지역이 되기도 하였다. 후삼국 시대 부여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주변 지역의 기록을 통하여 추정할 수 있다. 후백제 건국 초기 부여와 인접한 공주는 후백제 세력권에 속하였으며, 당시 실질적 지배자는 홍기(弘奇)라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궁예가 세력을 남부 지역으로 확대하여 감에 따라, 궁예의 지배하에 들게 된다. 918년 궁예가 왕위에서 축출되고 왕건의 고려가 건국되면서 다시 공주는 후백제권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934년 왕건이 서부 지역인 홍성을 장악하면서, 충청남도의 많은 지역이 고려에 속하게 된다. 공주도 고려의 세력권에 속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936년에는 태조 왕건이 논산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깨뜨려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이상과 같은 모습을 볼 때, 부여도 처음에는 후백제권에 있다가 이후 후고구려권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934년 홍성이 고려에 함락되면서 부여 역시 고려권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대체로 후백제의 북변에 해당하였으나 한때 궁예의 영향권에 들어 있던 시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문화유산]

백제 시대 유적으로는 각종 건물지를 비롯해 생산 유적, 고분 유적, 관방 유적, 불교 유적 등이 다수를 차지한다. 일반 유적으로는 부여구아리백제유적[충청남도 기념물]·부여용정리소룡골백제건물지[충청남도 기념물]·부여궁남지[사적]·부여 관북리 유적[사적], 부소산 와적기단 건물지, 금성산 와적기단 건물지, 쌍북리 두시럭골, 나복리 통실, 정동리 오얏골·꿩바위골, 정동리, 가탑리 가탑들 유적 등이 있다. 생산 유적으로는 부여읍부여쌍북리요지[사적]·부여쌍북리북요지[충청남도 기념물], 장암면부여 정암리 와요지[사적] 등의 가마터가 있다. 고분 유적으로는 백제 사비 시기의 왕과 왕족의 묘로 추정되는 부여읍부여 왕릉원의 고분군[사적]·부여 능안골 고분군[사적]을 비롯해 외산면부여지선리고분군[충청남도 기념물], 구룡면부여태양리백제석실고분[충청남도 기념물] 등이 발굴되었다.

관방 유적으로는 남쪽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관문이자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이 용전한 임천면 군사리부여 가림성[사적], 백제 도성의 일부였던 부여읍 쌍북리부여부소산성[사적]·부여 청산성[사적], 능산리부여 청마산성[사적], 은산면 은산리은산당산성[충청남도 기념물] 등이 있다. 또 궁성의 외성인 부여 나성[사적], 석성면 현내리부여 석성산성[사적], 규암면 신성리부여 증산성[사적], 홍산면 북촌리홍산태봉산성[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을 비롯해 부산성·외리산성·반산성 등이 있다.

불교 유적으로는 부여 정림사지[사적]와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이 있고, 부여 군수리 사지[사적], 부여 능산리 사지[사적], 부여 왕흥사지[사적], 부여 금강사지[사적], 호암사지[충청남도 기념물], 임천면 구교리대조사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대조사석탑[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 등이 있다.

그 외에 경작 유적이 능산리구룡면 구봉리, 부여읍 군수리, 정동리 오얏골·꿩바위골, 쌍북리 현내들·북포 유적, 가탑리 등에서 조사되었다. 그리고 백제 시대 재상을 선출하던 장소로 알려진 천정대[충청남도 기념물]가 규암면 호암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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