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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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豊 |
이칭/별칭 | 풍(豊),여풍(餘豊),여풍장(餘豊璋),풍장(豊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왕족.
[개설]
7세기 중엽 백제의 왕자로서 의자왕 때 사비에서 왜(倭)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성은 부여씨(扶餘氏)이고, 이름은 풍(豊) 또는 풍장(豊璋)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 부흥운동군의 요청에 따라 661년경 백제로 돌아와 왕이 되었으며, 663년 백강구전투(白江口戰鬪)에서 백제와 왜 연합군이 신라와 당 연합군에게 전멸당하자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가계]
부여풍(扶餘豊)[?~?]은 백제 제31대 의자왕(義慈王)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년] 조 및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년] 조, 『구당서』 권84 유인궤전 및 『신당서』 권108 유인궤전 등에는 이름이 ‘부여풍(扶餘豊)’·‘풍(豊)’·‘여풍(餘豊)’으로 되어 있고,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기(齊明紀) 6년 겨울 11월 조에는 ‘여풍장(餘豊璋)‘·‘풍장(豊璋)’으로 적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중국 역사서에는 부여풍이 ‘고왕자(古王子, 故王子)’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 권23 서명기(舒明紀) 3년 조에는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을 들여보내 볼모로 삼았다”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서명기 3년은 서기 631년으로 무왕 32년에 해당한다. 이에 풍장이 백제 무왕의 아들인지 의자왕의 아들인지 논란이 일었다. 무왕이 둘째 아들 풍장을 왜에 보낸 것을 의자왕으로 잘못 기록하였다는 견해, 풍장은 의자왕의 아들이라는 견해, 의자왕 즉위 초에 발생한 친위 정변에 밀려 왜국으로 망명한 교기(翹岐)와 같은 인물이라는 견해, 『일본서기』 권23 서명기 3년[631년] 조와 『일본서기』 권25 효덕기(孝德紀) 백치(白雉) 원년[650년] 조에 보이는 풍장은 무왕의 아들이고, 『일본서기』 권26 제명기 6년[660년] 겨울 10월 조의 풍장은 의자왕의 아들로서 동명이인이라는 견해, 무왕 때 왕자인 의자와 풍장이 권력 투쟁을 벌였고 풍장이 패배하여 왜로 쫓겨났다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다.
[활동 사항]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부흥운동군을 이끌던 복신은 660년 10월과 661년 4월 왜로 사신을 보내 부여풍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부여풍이 귀국하였는데, 『일본서기』 권27 제명기 7년[661년] 9월 조에는 “대산하(大山下) 협정련빈랑(狹井連檳榔), 소산하(小山下) 진조전래진(秦造田來津)을 보내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풍장이 본국에 돌아가는 길을 호위하게 하였다. 풍장이 나라에 돌아가자 복신이 마중 나와 절하고 국정을 맡기면서 모든 것을 위임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일본서기』 권27 천지기(天智紀) 원년[662년] 5월 조에는 “대장군 대금중(大錦中) 아담비라부련(阿曇比邏夫連) 등이 수군(水軍) 170척을 이끌고 풍장 등을 백제국에 보내 주고 풍장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칙을 선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에 부여풍의 귀국 시기를 두고 여러 설이 제기되었는데, 대체로 661년 9월 왜군의 1차 파병과 함께 부여풍, 부여충승(扶餘忠勝) 등이 귀국한 것으로 본다.
왕자와 고위 귀족 대다수가 당에 포로로 잡혀 갔기 때문에 왕위를 이을 적임자가 없어 복신과 도침이 왜국에 가 있던 부여풍을 맞아들여 왕으로 옹립하였다고 본다. 그 밖에도 부여풍은 왜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였기 때문에 왜국의 지원을 받기 쉬웠으며, 부여풍의 국내 기반이 약해서 복신과 도침이 권력을 유지하기 좋았다는 점 등을 흔히 거론한다.
부여풍이 왕으로 즉위함으로써 백제 유민들의 역량을 결집시켜 백제부흥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부여풍을 옹립한 복신이 동료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독점하자, 부여풍은 측근들과 함께 복신을 엄습하여 잡아 죽였다. 그리고 왜국이 보낸 군사 2만 7000명과 함께 힘을 합쳐 663년 8월 백강(白江) 어귀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웠으나, 왜군의 배 400척이 불타고 많은 병사가 몰살당하였다. 이에 부여풍은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며칠 뒤인 9월 7일 백제부흥운동군의 근거지인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