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748
한자 福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660년 - 복신 백제부흥운동을 이끔
몰년 시기/일시 663년연표보기 - 복신 백제부흥운동군 내분으로 부여풍에게 피살
성격 귀족
성별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귀족.

[가계]

복신(福信)[?~?]의 성은 귀실(鬼室)이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의 조카이자 백제 제31대 의자왕(義慈王)[재위 641~660]의 사촌동생으로 전한다. 부여 부소산에서 발견된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와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기(齊明紀) 6년 조에 기록된 ‘귀실복신(鬼室福信)’이라는 이름을 통하여 복신의 성이 귀실(鬼室)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성씨 기록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우경(右京) 제번(諸蕃) 하(下) 백제공(百濟公) 조에는 “백제공이 귀신에게 감화되었기 때문에 귀실을 씨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복신의 일족이 일본으로 망명한 이후 성씨의 유래를 수식하기 위하여 만들어 냈다는 견해, 백제에서 왕실이나 국가의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 내지 신관의 후손이기 때문이라는 견해, 복신무왕의 조카이므로 당연히 부여씨이어야 하지만 가문이 부여씨에서 따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라는 견해, 몰락 왕족이던 서동복신의 아버지 가운데 서동이 왕으로 옹립되자 복신의 아버지가 귀실씨를 칭하게 되었다는 견해 등이 있다.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권5 충청도 진잠현(眞岑縣) 전고(典故) 조에는 복신을 ‘고복신(高福信)’으로 표기하였는데, 근거를 밝히지는 않았다. 학계에서는 복신의 성을 귀실씨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활동 사항]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7 「백제본기」에 627년(무왕 28) 8월 “왕의 조카 복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라는 기록과, 당나라 태종이 “짐은 이미 왕의 조카 복신과 고구려·신라 사신에게 모두 조칙을 내려 화해하도록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 역사서 『구당서(舊唐書)』 권199 「백제전(百濟傳)」에는 “짐은 이미 왕의 조카 신복(信福)과 고구려·신라 사신에게”라는 기록과, “백제의 승려 도침과 옛 장수 복신(福信)이 무리를 이끌고 주류성에 웅거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라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에는 “무왕의 조카 복신(福信)이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있다가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을 차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라는 기록이 있다. 627년 당나라에 백제 사신으로 갔던 복신 또는 신복과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운동군을 이끈 복신을 동일인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663년(문무왕 3) 및 권28 「백제본기」 660년(의자왕 20)에 따르면, 백제가 멸망하자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던 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켰다. 660년 10월과 661년 4월 왜로 사신을 보내 부여풍(扶餘豐)의 귀국을 요청하였고, 부여풍이 귀국하자 왕으로 옹립하고 보좌하였다.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칭하였다. 얼마 뒤 복신도침을 죽이고 도침의 군사를 아우르자 부여풍이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를 주관할 뿐이었다. 어느 날 복신이 병을 핑계로 굴속 방에 누워서 부여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 하였으나, 도리어 부여풍이 측근들과 함께 복신을 엄습하여 죽였다고 한다. 복신이 왕의 조카임을 고려하면 백제 멸망 이전에 부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훈과 추모]

복신은 부여 지역에서 백제 군사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장군제인 은산별신제에서 제향되고 있다. 또한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충화 팔충사에 제향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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