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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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扶餘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수도로 한 백제 사비 시기의 왕족.
[가계]
부여효(扶餘孝)[?~?]의 성은 부여씨(扶餘氏)이다. 백제 제31대 의자왕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부여효는 660년 나당 연합군에 사비성이 함락되고,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갔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에 660년(의자왕 20)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에 당도하자 의자왕이 “태자 효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라는 기록과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644년(의자왕 4) “왕자 융을 태자로 삼고 크게 사면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기이(紀異)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조, 『구당서(舊唐書)』 권199 백제전과 권109 흑치상지전 및 권83 소정방전, 『신당서(新唐書)』 권220 백제전 및 권11 소정방전, 『일본서기(日本書紀)』 권26 제명기(齊明紀) 6년 7월 조,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扶餘 定林寺址 五層石塔)에 새겨진 ‘대당평백제비명(大唐平百濟碑銘)’,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에서 발견된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등에는 ‘태자 융(隆)’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융만 태자였다는 견해, 효만 태자였다는 견해, 효가 첫 번째 태자였는데 나중에 왕비 은고(恩古)의 아들 융으로 교체되었다는 견해, 융이 먼저 태자이고 은고의 아들 효로 교체되었다는 견해, 융과 효가 모두 태자였다는 견해, 의자왕이 질병을 앓으면서 의자왕 4년경 태자 융에게 국정 운영을 맡겼다가 대외 관계에서 수세에 몰리자 의자왕 15년경 효가 정권을 잡고 국정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기록의 혼란이 생겼다는 견해 등이 있다. 의자왕의 아들 중 융과 효는 어머니가 서로 달랐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대당평백제비명’에는 외왕 여효(外王 餘孝), 『구당서』 및 『신당서』에는 소왕 효(小王 孝)로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