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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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내수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4일 - 목천 공립 보통학교에서 3·1 운동 전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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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20일 - 입장면에서 3·1 운동 전개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29일 - 천안읍에서 3·1 운동 전개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30일 - 풍세면에서 3·1 운동 전개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31일 - 성환읍에서 3·1 운동 전개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4월 1일 - 병천면에서 3·1 운동 전개 |
발생|시작 장소 | 목천 공립 보통학교[목천 초등학교]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서리 1 |
성격 | 독립 운동 |
[정의]
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충청남도 천안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
[개설]
천안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중 대표적인 것은 1919년 4월 1일에 천안군 갈전면 아우내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이다. 이화 학당의 여학생인 유관순(柳寬順)[1902~1920]과 그 집안 인물 등이 주도한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에는 군중 약 3,0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역사적 배경]
일제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 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일제에 대항하여 각 지역에서 발생한 저항은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의하여 성립한 베르사유 체제는 국내외에서의 항일 민족 운동의 기운을 고조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천안 지역에서도 3월 14일의 목천 만세 운동을 시작으로 지역 곳곳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천안의 각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천안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 운동이 전개된 지역은 목천읍 지역이다. 목천 공립 보통학교[현재의 목천 초등학교] 학생 120여 명이 1919년 3월 14일 교정에서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교정의 한쪽에 헌병 분대가 있었음에도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헌병 분대 앞으로 이동하여 다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나서 학교 밖으로 진출하여 만세 운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를 저지하던 헌병들에 의해 많은 수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
목천읍에 이어 입장면에서도 1919년 3월 20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사립 광명 학교에 재학하던 민옥금(閔玉錦), 한이순(韓二順) 등과 직산 금광의 광부였던 안시봉(安時鳳)의 주도로 군중 600~700여 명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에는 박창신(朴昌信)이 동료 광부 안은(安銀), 한근수(韓根守) 등과 함께 직산 금광 광부의 교대 시간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고 이어서 양대리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헌병 주재소의 헌병 및 천안 철도 원호대 수비병과 충돌하였다. 이에 군중도 주재소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려고 격투를 벌이는 한편, 통신을 단절시키려고 주재소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입장면 지역에서는 3월 30일과 4월 8일에도 면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9일에는 천안읍에서 약 3,000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치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안읍 만세 운동은 이문현(李文鉉)·허병(許柄)·최오득(崔五得)·인시봉(印時鳳)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천안읍 만세 운동의 주도자 등 26명이 체포되었다.
풍세면에서는 3월 30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변의 산 위 20여 곳에서 수백 명의 군중이 횃불을 올리고 대한 독립 만세를 연호하였는데, 그중에서 200명 남짓한 이들이 풍서리 시장으로 시위행진을 하여 만세를 부르짖으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병천면 지역에서는 1919년 4월 1일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홍일선(洪鎰善), 김교선(金敎善), 조인원(趙仁元), 유관순(柳寬順), 유중권(柳重權), 유중무(柳重武) 등의 주도로 군중 약 3,000여 명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병천 헌병 주재소는 헌병 5명이 출동하여 해산에 응하지 않는 군중들에게 총을 쏘아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주도 인사들과 군중들은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옮기고, 일본 경찰에게 강력하게 항거하는 한편, 헌병 및 보조원들과 격투를 벌이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 만세 운동으로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어 일제의 잔인한 형벌과 옥고를 겪었다. 한편, 성환읍 지역에서도 1919년 3월 31일 밤 수천 명 군중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3·1 운동의 가장 큰 성과는 여러 계층의 시민이 참여하면서 민족의식이 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의식의 성장은 나중에 다양한 사회 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3·1 운동은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고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천안 지역의 3·1 운동도 지식인과 학생뿐만 아니라 농민, 노동자 등 다양한 계층의 민중이 참여한 거족적인 항일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천안 지역에서는 신간회 천안 지회의 설립, 천민을 중심으로 하는 형평 운동의 전개, 천안 출신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 참여 등 다양한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기반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3·1 운동에서 실질적으로 독립 만세를 활발하게 부르고 독립 만세 운동을 끈질기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농민·노동자·유학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3·1 운동은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전 국민적 독립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