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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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陽里大寺洞長丞祭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봉양리 대사동 |
집필자 | 임승범 |
의례 장소 | 장승 앞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봉양리 대사동 한절우 마을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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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장승제|민간 의례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열나흗날[음력 1월 14일] |
신당/신체 | 장승|솟대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성남면 봉양리에서 매년 정월 열나흗날에 마을의 평안을 위하여 지내는 제의.
[개설]
봉양리 대사동의 한절우 마을에서 지내는 장승제는 18세기 초반 정도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전하는 말로는 아랫동네인 봉양 2구의 풍흉에 따라 한절우 마을이 그 반대로 되어서 이를 막고자 장승제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는 장승 둘이 서 있는데, 마을 주민들은 정월 열나흗날[음력 1월 14일]에 이곳에 제물을 차리고 장승제를 지낸다. 장승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의 풍년과 각 가정의 안녕을 바라는 것이다. 장승제가 끝나면 주민들은 제주(祭主)의 집에 모여서 음복을 하며 한바탕 마을 잔치를 벌인다.
[연원 및 변천]
봉양리 대사동 장승제는 2012년 현재를 기준으로 보면 약 270년 정도 되었다고 전해진다. 아주 오래전에 아랫동네에 풍년이 들면 한절우 마을에 흉년이 들고, 한절우에 풍년이 들면 아랫동네가 흉년이 들어서 이를 막고자 입구에 장승을 세우고 제를 지내게 되었다고 전한다.
[신당/신체의 형태]
대사동 한절우 마을의 입구에 들어서면 오른쪽 언덕에 서방 백제 대장군(西方白帝大將軍)이 서있고, 왼쪽에는 ‘동방 청제 대장군(東方靑帝大將軍)’이라는 글씨가 먹물로 쓰인 장승이 서 있다. 서방 백제 대장군 옆에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릿대[솟대]가 서 있으며 주위에는 오래전에 깎아서 세운 듯한 장승 여러 기가 한데 서 있다. 동방 청제 대장군의 높이는 265㎝이고 둘레는 70㎝이다. 서방 백제 대장군은 이보다 조금 작다. 한편, 솟대의 높이는 약 5m 정도이다.
[절차]
한절우 마을에서는 정월이 되면 마을 주민들이 모여서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을 보아 제주 내외를 뽑는다. 이때 되도록이면 제주의 부인 나이가 쉰 살을 넘으면 좋다. 이는 제물을 장만하려면 부정을 가려야 하는데, 나이 많은 부인은 생리가 없기 때문에 부정 탈 일이 없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제주가 정해지면 축관(祝官)과 제물을 운반하는 유사(有司)를 각각 한 명씩 선정한다.
제의 1주일 전이 되면 마을 어귀에 금줄을 쳐 놓는다. 그리고 제관의 집 문 앞에도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 놓아 부정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제관들은 인근 장승샘에 가서 매일 목욕재계하며 술과 담배도 금한다.
열나흗날 아침이 되면 마을 젊은이들이 산에 올라가서 장승과 솟대로 만들 나무를 베어 온다. 이때 장승은 오리나무 중에 베어 온 것으로 만들고, 솟대는 소나무를 깎아서 제작한다. 저녁 여덟 시 무렵이 되면 제관들과 마을 남자들 중에 부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장승 근처에 모여서 제에 참석한다. 제물로는 돼지머리, 시루떡, 삼색과실, 포 등을 올린다. 제의 절차는 신을 받아들이는 강신(降神), 절을 올리는 배례(拜禮), 술을 올리는 헌작(獻爵), 축문을 읽는 고축(告祝)을 거쳐 다시 배례한 후 신을 보내는 송신(送神)의 순으로 진행되며 집집이 소지[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사르는 흰 종이]를 한 장씩 올려서 집안의 안녕을 기원한다. 제가 끝나면 참석한 사람들 중심으로 음복한다.
[부대 행사]
장승제에는 기본적으로 부정한 사람들은 참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장승 근처에서 제를 지내고 음복을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 밖의 나머지 주민들은 제주의 집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음복을 하고 마을 잔치를 벌이게 된다.
[현황]
한절우 마을에서는 2012년 현재도 정월 열나흗날에 새로 깎아서 만든 장승과 오릿대를 세우고 금줄을 두른 후에 제의를 모시며, 앞으로도 이러한 전통이 계속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