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501998 |
---|---|
한자 | 新葛里-祭 |
이칭/별칭 | 신갈리 아랫갈미 정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신갈리 아랫갈미 |
집필자 | 오선영 |
의례 장소 | 우물 -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신갈리 아랫갈미 |
---|---|
성격 | 정제 |
의례 시기/일시 | 정월 첫 번째 용날[辰日] |
신당/신체 | 우물 |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신갈리에서 정월 첫 번째 용날에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고자 공동으로 지냈던 마을 제사.
[개설]
신갈리는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신성리와 갈산리를 합하여 이루어졌다. 이곳에는 아랫갈미와 웃갈미라는 두 개의 자연 마을이 있다. 아랫갈미의 유황제는 정제(井祭)라고도 하는데, 물을 주관하는 용(龍)에게 마을의 화평과 풍농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그래서 새해가 되어 처음 돌아오는 용날[육십갑자 중 지지(地支)가 진(辰)인 진일(辰日)]에 제사를 올렸다.
[연원 및 변천]
신갈리 아랫갈미 유황제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마을이 형성되고 안정되면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17세기 전후로 여겨진다. 이는 아랫갈미에 제일 먼저 터를 잡은 기계 유씨(杞溪兪氏)의 입향 시기를 통하여 추적한 것이다.
마을에 전해졌던 유황제 축문에는 ‘중단 후 개시 정사 정월 칠일(中斷后開始丁巳正月七日)’이라는 기록이 있어 일제 강점기 초기에 잠시 중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마을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다시 시작된 유황제는 1990년대 후반에 다시 중단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유황제를 올리는 곳은 마을에 있는 ‘앞샘’으로 주민들이 모두 사용했던 공동 우물이다. 마을에 수도가 들어오기 전에 앞샘은 모두가 식수로 사용했다. 이 샘은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을 뿐 아니라 물이 좋아 마을에서 장수가 여덟 명이나 났다고 전해지는 유명한 샘이다.
[절차]
제관을 뽑는 것으로 유황제 준비를 시작하는데, 부부가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이 다 닿는 사람이 가장 좋다. 또는 이렇게 조건이 닿는 사람이 없으면 한 사람이라도 운이 닿고, 집안에 부정이 없는 사람 중에 뽑는다. 제관으로 뽑히면 사흘 동안 치성을 드린다. 대문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는데, 황토를 제관의 집에서부터 앞샘까지 이어지게 놓는다. 이 밖에도 제관은 목욕재계, 금연, 금주 등을 지킴으로써 스스로 정성을 다한다.
제사 지내기 사흘 전이면 마을 사람이 함께 샘 청소를 한다. 샘물을 품어 내면 제사를 지낼 때까지 샘물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미리 물을 떠 놓았다.
새해 첫 용날 저녁 8~9시 무렵이면 제관과 부정하지 않은 마을 사람들이 참여한 가운데에 앞샘에서 유황제를 올린다. 제의 절차는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마지막에 소지(燒紙)[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흰 종이를 사르는 일]를 올린다. 소지는 마을 전체를 위한 대동 소지를 가장 먼저 올리고, 용왕에 대하여 올리는 용왕 소지, 집집이 올리는 가가호호 소지 순이다. 제사를 마치면 대동샘에 미역국을 풀어 놓고, 제물을 골고루 떼어 샘 옆에 있는 향나무에 걸어 둔다.
[축문]
유황제가 폐지되기 직전 마지막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갑년 정월 경인삭 사일 계사(維歲次甲年正月庚寅朔四日癸巳)/ 유학 양남용 감소고우(幼學梁南龍敢昭告于)/ 용왕지신(龍王之神) 천일생수(天一生水) 정원용출(井源湧出)/ 연거세면(年去歲面) 불왕태래(不往泰來) 가가헌성(家家獻誠)/ 춘하추동(春夏秋冬) 안과태평(安過太平) 복이주과(伏以酒果)/ 근신건고(謹伸虔告) 상향(尙饗)/ 중단 후 개시 정사 정월 칠일(中斷后開始丁巳正月七日).”
[부대 행사]
제사를 마치면 앞샘에 모인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음복을 한다. 또한 제사에 올렸던 백설기를 ‘재수떡’이라 하여 나누어 준다. 이를 마치면 주민들은 모두 제관의 집으로 가서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눈다. 한편, 유황제를 마친 직후 샘물을 제일 먼저 길어 가는 사람은 그해 소원을 성취한다는 믿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