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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리 구정 산신제와 수살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502002
한자 杏亭里九亭山神祭-水殺祭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행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강성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산제당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행정리 구정 마을 지도보기 뒷산
의례 장소 장승·솟대 앞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행정리 구정 마을 입구
성격 민간 의례|동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 열나흗날[음력 1월 14일]
신당/신체 산제당|장승·솟대

[정의]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행정리에서 격년마다 정월 열나흗날에 농사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천안시 동남구 광덕면 행정리구정 마을에서는 격년마다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산신제와 수살제를 지내는데, 짝수 해에는 산신제와 수살제를 지내고 홀수 해에는 줄다리기를 한다.

구정 마을에서는 산신제와 수살제의 진행을 위하여 정월 초사흗날에 대동 회의를 개최하여 음식을 준비하는 주당(主堂)을 비롯한 제관(祭官)·축관(祝官)을 선정한다. 그해 주당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서 다복하고 우환이 없는 노인으로 지목하되, 행사 당일의 일진과 나이를 따졌을 때 부부가 모두 길일인 생기복덕일(生氣福德日)이 닿아야 한다. 주당과 제관으로 선정된 사람은 1주일 동안 금기를 지켜야 했는데 현재는 3일 동안 금기를 지키고 있다.

정월 초여드렛날부터는 산제당으로 올라가는 길을 닦고 주변을 말끔하게 청소한다. 아울러 산제샘을 품는데 예전에는 산신제를 마치는 날까지 매일 품었다고 한다. 또한 주당과 제관은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금하는 표시로, 집에 왼새끼를 꼬아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 놓았다. 그리고 매일 밤 산제샘에서 찬물로 목욕재계했다. 예전에는 얼마나 금기가 엄했는지 주당의 집을 비우고 세 사람이 숙식을 함께하며 일주일 동안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마을에서도 출산을 앞둔 산모는 친정으로 보내거나 다른 마을로 보낼 만큼 주민들이 엄격하게 부정을 가렸다.

산신제와 수살제의 비용은 본래 정월 초사흗날 이후에 집마다 걸립[사람들이 패를 꾸려 풍물을 치고 재주를 부려 마을 경비로 쓸 돈이나 곡식을 구하는 일]을 돌아서 충당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걸립을 담당할 풍물꾼이 마땅치 않자 동계의 기금과 주민들의 기부금으로 제물을 준비한다. 제물은 돼지머리, 백무리[백설기], 삼색과실, 통북어 두 마리, 나물 세 가지, 탕, 메, 술, 맑은 물 등이다. 이 중에서 술은 산제샘의 물을 길어 주당의 집에서 직접 빚고, 메는 당일 산제당으로 올라가서 지어 올린다.

[연원 및 변천]

산신제와 수살제의 연원은 알 수 없다. 주민들은 예로부터 마을의 안녕과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지내 왔다고 한다. 산신제는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지만 수살제는 1973년께에 새마을 사업이 한창일 때 관청에서 미신을 타파한다며 장승과 솟대를 강제로 없애 버렸다. 이에 따라 수살제도 자연스레 중단되었는데, 이후로 마을에서 교통사고로 죽는 등 크고 작은 불상사가 끊이질 않아 2000년 정월에 장승과 솟대를 복원하고 다시 수살제를 지내게 되었다.

[신당/신체의 형태]

구정 마을의 제당은 위에 있는 제당인 상당(上堂)인 산제당과 아래쪽 하당(下堂)인 장승·솟대로 구성된다. 산제당은 마을 뒤편 기슭에 있다. 제당은 블록으로 지은 단칸 기와집이며 면적은 10~13㎡이다. 본래는 초가였던 것을 중수한 것인데, 우측 벽면에는 ‘서기 1965년 을사년 3월 17일 미시(未時) 재축(再築) 입주상량(立柱上樑)’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어 1965년 3월 17일에 중수했음을 알 수 있다. 산제당 인근에는 두 개의 산제샘이 있었다. 하나는 제당 어귀에 있는데 예전에 제관들이 목욕할 때에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산제당 너머에 있다.

장승과 솟대는 마을 앞 도로변 삼거리에 있다. 남녀 목장승 한 쌍이 나란히 서 있는데, 그 중간에 솟대가 세워져 있다. 이 장승은 속칭 수살이라 불린다. 남장승의 동체에는 ‘천하 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장승에는 ‘지하 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 쓰여 있다. 본래 이 장승은 마을 북쪽인 운당리 경계에 여장승이 서 있었고 반대편으로 500m가량 떨어진 지점에 남장승이 있었던 것을 다시 복원하면서 옮긴 것인데, 그때는 ‘남방 적제 지하 대장군(南方赤帝地下大將軍)’, 남장승에는 ‘북방 흑제 천하 대장군(北方黑帝天下大將軍)’이라 쓰여 있었다.

솟대는 속칭 수살대 또는 오리[기러기]라고 불린다. 긴 장대 위에 새를 얹은 모습이다. 주민들에 따르면 예전에는 한지로 만든 작은 깃발을 오리에 꽂았다고 하며, 깃발에는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부르는 의미가 담긴 축원문을 새겼다고 한다. 장승과 솟대는 새마을 사업 때 미신을 타파한다고 하여 없앤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절차]

당일 저녁 주당과 제관·축관은 냉수마찰을 하고 열 시쯤 제물을 짊어지고 산제당으로 향한다. 풍물패는 흥겹게 길군악 가락을 울리며 산제당 입구까지 배웅한다. 바야흐로 제물이 차려지면 신호를 보내 풍물을 멈추게 한다. 산신제의 절차는 분향(焚香)·강신(降神)·초헌(初獻)·독축(讀祝)·아헌(亞獻)·종헌(終獻)의 순으로 진행된다. 부정을 없애고 소원을 빌려고 흰 종이를 사르는 절차인 소지(燒紙)는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만동 소지(萬洞燒紙) 한 장을 올려준다. 산신제를 마치면 다시 풍물이 시작된다.

마을로 하산한 주당과 축관은 주당의 집에서 백무리를 쪄서 풍물패를 대동하고 장승과 솟대가 서 있는 마을 어귀로 가서 수살제를 지낸다. 그 절차는 산신제와 동일하게 제를 지내되 축문이 생략된다. 또한 소지는 부정한 사람을 제외한 가가호호의 호주를 위한 대주 소지(大主燒紙)를 모두 올려 주고, 자녀가 객지로 나갔거나 군에 입대한 가정에서 특별 소지를 부탁하면 무탈하기를 축원해 준다.

[축문]

산신제에 사용되는 축문은 다음과 같다.

“동산제축(洞山祭祝)/ 유세차 간지 정월 간지 삭 십사일(維歲次干支正月干支朔十四日)/ 천안시 광덕면 구정리 신토위 본리선속유학 ○○○ 감소고우(天安市 廣德面 九亭里 神土位 本里選屬幼學 ○○○ 敢昭告于)/ 토지지신 복유존신 대천선화 진아일방(土地之神 伏維尊神 代天宣化 鎭我一方)/ 비민유조 사안이락 유신지사 사포이난(鄙民有造 使安而樂 惟神之賜 使飽而暖)/ 유신지우 도민지덕 가민혜택 고수심미(惟神之佑 道民之德 加民惠澤 顧雖甚迷)/ 거미신공 일리동속 사탄기궁 보사급진(擧味神功 一里同屬 思彈其躬 報祀及辰)/ 유월지정 생주수박 연출미성 유신항격(惟月之正 牲酒雖薄 宴出微誠 惟神降格)/ 서감우충 망수묵우 극유시종 상향(庶鑑愚衷 望垂黙佑 克有始終 尙饗).”

[부대 행사]

구정 마을에서는 산신제를 지내는 날 마루시루를 올리는 전통이 있다. 이는 충청 지역 산간 마을의 산신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중시루 또는 마짐시루와 같은 것이다. 즉, 산신제가 마무리되면 주당은 마을을 향하여 “마루시루 떼시오!”라고 크게 소리를 질러 알려 준다. 그 소리를 듣고 각 가정에서는 미리 준비해 둔 떡시루를 올리며 집안이 무탈하기를 비는 고사를 지낸다.

[현황]

구정 마을에서는 지금도 격년으로 산신제와 수살제를 지낸다. 홀수 해에 거행하는 줄다리기는 1999년에 복원된 이후부터는 객지로 나가 있는 향우회가 주축이 되어 준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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