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4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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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達峴戰鬪 |
영어의미역 | Battle of Bakdalhyeon Administrative District |
이칭/별칭 | 박달재 전투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택균 |
[정의]
1217년(고종 4) 박달현에서 고려군이 거란족을 크게 물리친 전투.
[개설]
박달현 전투는 몽고군에게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이 충청도 이남으로 남하하는 것을 막고자 박달현에서 벌인 전투이다. 박달현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와 백운면 평동리의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역사적 배경]
12세기 말 몽고 초원에서 일어난 몽고제국은 13세기에 들어 강성해지면서 금나라를 압박하였다. 금나라에 굴복하여 100여 년간 지배를 받던 거란족의 야율사포(耶律斯布)는 이 틈을 타 1216년 랴오둥반도[遼東半島] 징주에 대요수국을 세웠다. 그러나 야율사포는 70여 일 만에 피살되고, 나라는 몽고의 위협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과]
1216년 8월 거란족은 몽고군에 쫓겨 방위가 허술한 동쪽의 압록강 방면으로 쳐들어온 뒤 1217년에는 강원도와 충청도 방면으로 진입하고, 7월 5일에는 황려현 법천사(현 원주시 문막읍 법천리 법천사지)까지 진출하였다. 이에 중군병마사 최원세와 전군병마사 김취려는 이곳을 공격하고, 독점에서 유숙한 뒤, 다음날 원주와 충주 두 방향으로 나누어 추격하였다. 맥곡(지금의 엄정면)에서 합류한 두 부대는 거란족 30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제천 지역으로 압박함으로써 박달현에서 접전하게 된다.
1217년 7월 8일 김취려와 최원세가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족을 쫓아 박달현에 이르러 진을 치자, 가발병마사 임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다. 고려군은 김취려의 작전에 따라 고갯마루에 올라 밤새 지켰는데, 다음 날 동이 틀 무렵 고개 남쪽으로 수만의 거란족이 병력을 나누어 좌우로 올라오면서 요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이에 맞서 고려군 역시 좌우로 병력을 나누어 거란족의 진격을 막고, 김취려 등의 지휘부는 중앙에서 지휘하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결국 거란족은 크게 패하여 남녀 노약자와 병장기 등을 버린 채 남하를 포기하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결과]
거란족은 고려군의 추격을 피해 대관령을 넘어 북쪽으로 달아나 여진 땅으로 들어갔다. 이듬해에 다시 세를 회복하여 여러 차례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고려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자 강동성(현 평안남도 강동읍)으로 들어가 웅거하였다. 1218년 9월 몽고가 고려를 돕는 명목으로 군량과 군사를 요구하며 연합 공격을 제의해 오자 고려는 이에 응하여 1219년(고종 6) 1월 강동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의의와 평가]
박달현 전투의 승리는 거란족의 남하를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이들의 예봉을 꺾는 단초가 되었다. 그러나 박달현 전투에서 패한 거란족 잔당이 머물던 강동성을 몽고와 연합하여 함락한 뒤 몽고는 출병의 대가로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 과정에서 고려와 몽고 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