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5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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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孝立獄事 |
영어의미역 | Administration of the Major Criminal Cases Such as Murder and High Treason of Yu Hyorip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욱 |
[정의]
1628년(인조 6) 인조반정에 불만을 품은 충청북도 충주 출신 유효립 등이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 이공(李珙)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 실패한 역모 사건.
[역사적 배경]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권력에서 밀려난 대북파 잔존 세력인 유효립(柳孝立) 등은 정묘호란의 패배, 군적법(軍籍法)과 호패법 시행 등으로 민심이 동요하자 이를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계룡산 천도설 등의 비결(秘訣)을 활용하는 한편, 서울로 가서 도감초관 윤계륜(尹繼倫), 허유(許逌), 정심(鄭沁), 김탁(金鐸), 유두립(柳斗立) 등과 손을 잡는 등 인조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경과]
유효립은 광해군 때 외척으로서 승지를 지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숙부 유희분이 참형되고, 제천으로 유배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허유·정심 등과 교유하면서 역모를 꾀하였다. 유효립은 먼저 계룡산으로 천도하는 것이 천명이라는 비결을 활용하는 한편, 인성군(仁城君)이 왕이 될 것이라는 비결을 유포함으로써 세력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아울러 몰래 가마를 타고 서울로 가서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결탁하는 한편, 궁궐의 내시와 대궐문의 수문장까지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1628년 1월 4일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모의하고, 무기를 지닌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몰래 잠입하려고 하였다.
1628년 1월 3일 이 사실을 알아챈 허유의 삼촌인 전직 부사 허적(許 示+啇)이 “허유 등이 내일 대궐을 범하기로 약속하였다”고 고변하였다. 이를 들은 영의정 신흠(申欽)은 신속하게 비변사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해 고변한 허선(許選) 등과 함께 잠복해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무기를 싣고 들어오던 무리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결과]
유효립·허유 등 관련자 50여 명이 모두 처형되고, 고변한 허선과 이를 효과적으로 처리한 신흠·홍서봉 등 11명은 영사공신에 책봉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주에 세거한 임천조씨 조희맹(趙希孟)도 소장을 올려 이에 관련된 인물을 고발하였다. 유효립이 변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록 북인으로 제천에 유배되어 있었지만 충주 지역에 그의 혈족이 포진하고 있던 것이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유효립의 제수는 이곳에 세거하고 있던 민인백의 딸이었고, 사촌 매제인 선산김씨 김세렴(金世濂)도 충주에 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충주 지역에서 북인이 퇴출되었으며, 충주목은 충원현으로 강등되었다.
[의의와 평가]
유효립 옥사에서 주목할 점은 비결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 점이다. 유효립은 “초계(草溪)에 조수(潮水)가 들어오고 계룡(鷄龍)에 서울을 건립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모두 벙거지를 쓰고 털옷을 입는다”, “술년(戌年)과 해년(亥年)에 사람이 상하는 화가 발생하는데 인년(寅年)과 묘년(卯年)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자년(子年)과 축년(丑年)에는 안정되지 않다가 인년(寅年)과 묘년(卯年)에 패한다”, “진년(辰年)과 사년(巳年)에 인성(仁城)을 얻는다” 등의 비결을 유포하여 민심을 얻으려고 하였다. 또 호패법과 군적법의 시행으로 민심이 이반하는 것을 기회로 포착하려 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