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09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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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容大 |
영어음역 | Bak Yongdae |
이칭/별칭 | 성기(聖器)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일성 |
[정의]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본관은 밀양(密陽).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문정공(文貞公) 박승휘(朴承輝)이며, 아버지는 공조참의 박세병(朴世秉)이고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활동사항]
박용대는 1865년(고종 2) 진사에 합격하고 1869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書)에 제수되었다. 1871년 홍문관부수찬이 된 뒤 평북감시(平北監試), 경시관(京試官), 충청우도암행어사, 응교를 거쳐 1875년 호조참의를 지냈다. 1886년 이조참판, 1888년 별시초시 시관(別試初試 試官)과 한성좌윤, 1889년 승정원일기청당상과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891년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곧 사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에 참여하여 의정부교정당상(議政府校正堂上)에 중용되어 제도개혁을 담당하였으며 곧 의정부도헌(議政府都憲)에 임명되었다. 1895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칙임 4등이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사직, 시묘하였다. 1897년 복직, 중추원의관 칙임 3등에 제수되었으며, 1898년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가 되었다. 1899년 정2품 비서원경(秘書院卿)에 임명되었으며 법규교정소의정관(法規校正所議定官)을 겸임하였으며, 1900년 충청남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1901년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가 1903년 복직하여 문헌비고찬집소당상(文獻備考纂輯所堂上), 태의원경(太醫院卿)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비서경(秘書卿)과 태의원경(太醫院卿)을 차례로 역임하였고 1905년 법부대신(法部大臣)이 되었다. 1906년 홍문관학사와 1907년 규장각제학이 되어『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완료하여 고종에게 진상하였다. 1908년 국조보감감인관(國朝寶鑑監印官)에 제수되었으며, 1909년 훈(勳)2등 훈장을 받았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후 일제 회유책의 일환으로 준 남작(男爵)의 작위를 받았다.
[저술 및 작품]
시사(詩詞)에 능하여 당대에 문명을 날렸으며, 일본 유람 시 후지산[富士山]에 관한 시를 남겼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09년 훈2등 훈장을 받았으며, 1910년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