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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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戰鬪 |
영어의미역 | Chungju Battl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병권 |
[정의]
1950년 6·25전쟁 중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한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역사적 배경]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두 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 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치 상태는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게릴라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 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 활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무장 세력에 의한 전복 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북한의 김일성은 전면적인 남침을 감행하여 무력에 의한 남북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경과]
북한군의 불법 남침이 개시된 지 불과 4일 만에 38선의 서부전선이 돌파되고 한강 방어선의 구축이 실패로 돌아가자,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충주 방어에 들어갔다.
1950년 7월 1일 후퇴하던 국군 제6사단 제2연대는 충주에 진입하여 이튿날부터 7월 7일까지, 중앙탑면 창동리에서 상종민동에 이르는 21㎞ 지역의 방어를 맡았다. 1950년 7월 8일 오전 1시를 기하여 북한군 제12사단의 대대적인 교란 사격이 시작되더니 오전 4시 30분부터 공격 준비 사격이 이어졌다. 오전 5시에는 북한군 제30연대가 도하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국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북한군을 격퇴하였다.
오전 5시 30분 북한군은 국군 제3대대 방어 지역에 대대적인 포화 공격을 실시하여 반송과 목행 나루에서 일제히 도하 공격을 개시하였다. 국군은 이에 대응하여 백병전까지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오전 7시경에 충주 쪽으로 철수하여 금재와 막은대니재 사이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였다. 오전 8시 30분에 사단장(대령 김종오)으로부터 제2연대(연대장 대령 학병선)를 철수시켜 충주 남쪽에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고, 단월리와 대림산 간에 저지 진지를 급하게 구축하였다.
그러나 36번 도로와 세성리 일대가 노출되자 제2연대 병력을 수회리에 집결시켜, 오후 4시경 326고지와 적포산에 이르는 일대의 진지를 점령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오후 6시경 제2연대 제2대대가 제19연대로부터 배속 해제되어 수안보로 투입되고, 제19연대 제2대대가 수회리로 들어옴으로써 국군 제2연대의 전투력이 증강되었다. 이에 제2대대는 목벌리 쪽으로 진출하여 충주에 있는 북한군을 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진천 북방에서 수도사단을 엄호하던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는 수안보에 도착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국군 제6사단은 북한군 제1사단과 격전을 치르고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여 부대를 정비한 뒤, 7월 10일 사단장의 명령에 따라 지휘소를 화천리로 이동하고 연풍으로 가는 길목 좌우의 478고지부터 610고지에 이르는 곳에 새로이 진지를 편성하여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결과]
7월 11일 전차 네 대를 선두로 북한군이 수안보에 침입하자 국군은 그들을 맞아 싸우다가, 명령에 따라 오후 8시경부터 이화령으로 철수함으로써 전투는 끝을 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