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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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塔坪里七層石塔 |
영어의미역 | Seven-story Stone Pagoda in Chungju Tappyeong -ri |
이칭/별칭 | 중앙탑,탑평리 석탑 |
분야 | 종교/불교,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탑과 부도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엄기표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2년 12월 20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제6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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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국보 재지정 |
성격 | 석탑 |
양식 | 석탑 양식 |
건립시기/연도 | 통일신라시대 |
재질 | 돌 |
높이 | 1,219.5㎝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
소유자 | 국유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탑.
[개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남한강변에 인접하여 세워졌다. 홍수 등으로 인한 석탑의 붕괴를 막기 위하여 높은 토단을 조성한 다음, 그 위에 대형의 석탑을 건립하였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건립할 때 상당한 관심과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칠층석탑 일원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지표와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삼국시대 이후 제작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들이 출토되어 고대시대부터 사람들이 머물렀음을 알려주었다. 사찰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사(寺)’명(銘)의 기와를 비롯하여 고대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석탑의 성격과 건립 시기를 추정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석탑은 일명 중앙탑(中央塔)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성격과 구체적인 건립 시기를 놓고 다양한 견해들이 나와 있는 상태이다.
[건립경위]
여러 차례의 조사로 석탑 일대에 사찰을 비롯하여 많은 건물지가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수차례 건물들이 새롭게 들어서면서 파괴가 심하여 건물지들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석탑의 건립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석탑은 일반적으로 사찰 가람에서 중요 신앙과 예배의 대상으로 건립되었는데, 이 석탑은 구체적인 석탑 건립 배경에 대해서 여전히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석탑은 사찰 가람의 핵심적인 조형물로 건립되지만 경우에 따라서 표식적(標式的) 기능이나 비보적(裨補的) 성격으로도 건립되었다. 이 석탑은 오래전부터 중앙탑으로 불리고 있으며, 석탑의 위치가 고대의 주요 수로였던 남한강변의 높은 토단 위에 세워진 점으로 보아 순수 불교적인 신앙의 대상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탑의 구체적인 건립 시기와 성격에 대해서는 석탑이 세워져 있는 토단(土壇)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할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일대의 남한강변 높은 토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가까운 곳에 충주박물관과 탑평리가 소재하고 있다. 현재는 석탑을 중심으로 중앙탑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형태]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크게 높은 토단과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토단은 아직까지 구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홍수로 인한 석탑의 피해를 막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이층기단으로 결구되었는데, 기단 앞쪽에 석등 하대석이 남아 있어 원래는 석탑과 석등이 한 쌍으로 건립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층기단은 여러 매의 판석형 석재를 결구하였으며,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였다. 하대갑석은 상면을 경사지게 치석하여 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하였으며, 상부에 호각형으로 2단의 상층기단 괴임을 마련하였다. 상층기단 면석부에도 우주와 탱주를 세워 각 면을 구획하였으며, 상대갑석은 하부에 높은 부연을 마련하여 석탑의 건립 시기가 오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갑석 상면 합각부는 낮은 돋을대를 표현하였으며, 가운데에는 사각형으로 각호각형의 3단 괴임을 두고 그 위에 별도의 높은 탑신석받침을 마련하였다. 이 받침대는 높은 하중의 탑신부를 견고하게 지탱하기 위하여 고안된 시설로 보인다. 탑신부는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체감을 보이고 있어 안정된 인상을 주고 있다. 탑신석은 좌우에 우주를 세웠으며, 2층 탑신석부터 높이를 급격하게 줄여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석탑의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옥개석]은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일정하게 좌우 너비를 줄여 고준함과 동시에 안정감을 주고 있다. 지붕 받침은 모두 5단으로 마련되었으며, 처마부는 수평으로 치석되었다. 낙수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도록 다듬었고, 합각부 끝에는 반전(反轉)을 살짝 주어 경직성을 탈피하도록 했다. 합각부 처마부에는 풍탁을 달았던 원공이 뚫려있어 최초 건립 당시에는 화려한 외관으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상륜부는 2층으로 구성된 노반이 받침대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 위에 가운데가 볼록한 원주형 석재가 있고, 앙화석이 꼭대기에 올려져 있다. 원래의 상륜부를 알 수 없어 아쉽지만, 현재 상륜부에 올려져 있는 부재들도 최초 건립 당시의 부재인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기단 아래와 6층 탑신석에서 사리 장치가 발견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석탑에 대한 수리 공사가 있었는데 6층 탑신석 상면에 사리공(舍利孔)이 있었으며, 사리공은 석재로 제작된 뚜껑으로 막음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리공에서 목제 사리함, 은제 사리호, 고경(古鏡) 2매, 경문(經文)으로 추정되는 종이, 유리병 등이 수습되었다. 또 기단 아래 석탑 기초에서 또 다른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당시 판석형 석재를 제거하자 뚜껑돌이 나왔고, 이를 제거하자 그 안에 정교한 황동제개부호(黃銅製蓋付壺)가 있었는데, 일부 파손된 부재들이 물기가 있는 바닥에 떨어져 토사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이들 사리구에 대한 일제강점기의 기록에 의하면 6층 탑신석에 봉안된 사리구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 아래에 봉안된 사리구는 통일신라시대 봉안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6층 사리장치는 고려시대에 석탑의 중수나 보수시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대형으로 건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치석 수법과 정연한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으며, 세부적으로 괴임대와 지붕 받침의 치석 수법 등이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현황]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부분적으로 보수의 흔적이 보이지만 상륜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2006년 보존 처리를 실시하기도 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은 대형으로 통일신라시대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충주 지역은 통일신라시대 중원경(中原京)의 치지(治地)로 알려져 있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충주의 역사적 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석탑이 대형으로 만들어졌지만 우수한 치석과 결구 수법을 보이고 있어 제작 기술의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는 석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을 만드는 기술이 총동원되어 응집되어 있는 석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리나라를 흔히 석탑의 나라라고 하는데, 이 석탑은 그러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또한 세부적으로는 기단부와 탑신부의 각부 치석 수법이 정연하고, 당대의 석탑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는 석탑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