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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편찬의 모태가 된 충주사고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127
한자 高麗史編纂-母胎-忠州史庫
영어의미역 The Historic Storehouse in the Chungj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일성

[개설]

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사고란]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삼국시대부터 편찬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임금마다 그 사적을 실록(實錄)으로 만들어 소중하게 보관하였는데, 이들 역사서나 실록을 보관했던 건물을 실록각 또는 사고(史庫)라 하였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 등 내우외환이 겹치면서 소중한 실록이 불타버리게 되자, 안전한 보관을 위하여 고려 고종 때에는 궁중 외에 당시 안전한 장소였던 경상남도 합천 해인사에 외사고(外史庫)를 설치하게 되었다.

해인사의 실록은 몽고의 침략과 왜구의 창궐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1390년(공양왕 2)에 충주로 옮겨져 보관되면서 이후 충주사고로 명명되었다. 1445년(세종 27) 전주와 성주에 새로운 외사고를 설치하여 춘추관(春秋館)·충주(忠州)·전주(全州)·성주(星州)의 4사고가 되었다. 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불에 타 없어질 때까지 약 200년 간 존속한 외사고의 하나였다.

[충주의 지리적 위치]

충주는 남으로 소백산맥이 경상도와 경계를 이루며 소백준령의 일부가 북으로 뻗어 월악의 영봉을 이룬다. 그리고 그 지맥이 다시 북으로 달려 대향산(大香山)·대림산(大林山)·남산(南山)·계명산(鷄鳴山)이 되어 충주의 동쪽과 남쪽을 병풍처럼 막고 있다. 북으로는 천등산(天登山)·국망산(國望山)·보련산(寶蓮山)·가섭산(迦葉山) 등의 비교적 높은 산에 둘러싸여 산간 분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오대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이 영월·단양·청풍을 지나 충주에 이르고 있다. 또한 속리산에서 북으로 달린 달천탄금대에서 합하여 서북향하여 우리나라 중심부를 가르며 서해로 흘러간다.

충주는 남한강을 이용한 물길이 발달되어 이 물길을 이용하여 상류를 장악할 수 있고 남으로는 소백산맥을 제압할 수 있는 요새이다. 이로 인해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군사적인 요충지였으며, 한강의 수운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시되어 왔다. 이처럼 외적의 방비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충주의 지리적 요건이 고려되어 사고가 설치된 것이다.

[충주사고의 설치 과정]

고려의 사고는 처음에는 궁궐 내에 두었다. 그러나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 침입으로 사적이 모두 타버렸고, 1126년(인종 4) 2월 이자겸의 난으로 만월대의 연경궁(延慶宮)이 전소될 때 사관(史館)도 소실되었다. 내·외의 난으로 사관이 소실되자 고려는 안전한 장소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고자 하였다. 1227년(고종 14) 9월에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여 궁궐 내 사관에 일부를 보관하고 또 다른 일부는 해인사에 보관하였다. 해인사는 개경에서 먼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당시 남쪽에는 외적 침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해인사에 고려의 역대 실록을 보관했던 것이다.

1237년(고종 24) 몽고군이 경상도까지 침입하여 대구 부인사 대장경판과 경주 황룡사 구층탑이 타버릴 무렵에 해인사에 보관했던 고려의 역대 실록은 창선도(彰善島)[현 경상남도 남해군]로 옮겨졌다. 창선도에 보관했던 고려 역대 실록은 1384년(원종 10) 5월에 왜구를 피하여 진도로 옮겨졌다. 진도에 있던 고려 역대 실록이 무엇때문에 해인사로 옮겨졌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1361년(충정왕 10) 홍건적의 난이 있을 때에는 이미 해인사로 돌아와 있었다.

1379년(우왕 5) 9월에 왜구가 단계·거창·야로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해인사에 있던 고려 역대 실록도 선산 득익사(得益寺)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뒤 고려 역대 실록은 보주(甫州)[현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보문사(普門社)로 옮겨졌고, 1381년(우왕 7) 7월에 왜구가 안동 지방을 침입하자 보문사에 보관했던 고려 역대 실록을 충주 개천사(開天寺)로 옮겼다.

1383년(우왕 9) 왜구가 단양·제천·평창·횡천·영주·순흥 등지로 침입, 소백산맥의 남북으로 들어오니 충주도 위험해졌다. 충주 개천사에 약 2년간 보관되었던 고려 역대 실록은 죽주(竹州)[현 안성] 칠장사(七長寺)로 옮겨졌다. 죽주 칠장사에서 약 7년간 보관된 고려 역대 실록은 1390년(공양왕 2) 6월에 왜구가 죽주까지 침입하니 그 해 12월에 다시 충주 개천사로 옮겨졌다.

개천사에 보관된 고려 역대 실록은 1419년(세종 원년) 9월과 1423년(세종 5) 12월에 『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서울로 옮겨갔다. 고려 역대 실록은 세종 초에 충주읍성 안으로 옮겨져 민가 속에 있는 기존 건물에 옮겨져 있었다. 외방 3사고가 지어지는 1439년(세종 21)부터 1477년(성종 4) 8월까지 전주사고가 지어지는 사이에 새로운 사고가 지어졌다.

이때 지어진 사고의 크기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성주사고의 기록에 의하면 지상에 돌을 깔고 사다리를 놓고 땅에서 높게 층각을 이루었다 하니, 이는 습기와 화재 방지를 위한 특수 구조로 지어진 것 같으며 아마도 충주사고도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으리라 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객사 동남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충주시 성내동 453번지에서 458번지 일대에 사고가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충주사고에 보관된 고려시대 장서]

충주사고에는 고려 역대 실록 전부가 보관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고려 역대 실록을 이용하여 『고려사』를 편찬한 정총(鄭摠)의 「고려국사서(高麗國史序)」에는 고려는 처음부터 역대의 모든 실록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412년(태종 12) 8월에 사관 김상직(金尙直)에게 충주사고의 서책을 가져다 바치도록 명했는데 서책 중에 ‘고려역대사적(高麗歷代事跡)’이 있는데 이것이 고려 역대 실록일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부터 충주사고에 보관된 고려 역대 실록은 세종『고려사』를 편찬하기 위하여 서울로 옮겨갔으며 그외의 서적도 서운관(書雲觀), 전악서(典樂署), 춘추관(春秋館)으로 옮겨갔고, 기타의 서적 일부만 충주사고에 남아 있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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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부터 충주사고에 있던 서책

[충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시대 장서]

1321년(세종 3) 3월에 고려가 명나라를 섬긴 이후의 일체 문건은 단지 원본만 보관해오고 있었으나 수재나 화재가 생길 경우 다시 참고할 수 없게 될 것을 우려하여 필사하여 중앙이나 지방의 사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이것이 조선조로서는 처음으로 충주사고에 보관한 문서이다.

조선조 실록은 1413년(태종 13) 3월에 『태조실록(太祖實錄)』15권, 1426년(세종 8) 8월에 『정종실록(定宗實錄)』 6권, 1431년(세종 13) 3월에 『태종실록(太宗實錄)』36권을 편찬하였고, 같은 해 4월에 예문관검열 김문기(金文起)를 파견하여 『태조실록』·『정종실록』·『태종실록』을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이로써 충주사고에 처음으로 조선조 실록이 봉안되었다.

1425년(세종 7) 11월에 태종원경왕후의 『상장의궤(喪葬儀軌)』를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시정기(時政記) 부본(副本)을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그후 삼대 실록에는 정도전의 난과 박포의 난에 대한 기사의 착오와 누락된 기록이 많다 하여 춘추관감관사(春秋館監館事) 신개(申槪), 지관사(知館事) 권제(權踶), 동지관사(同知館事) 안지(安止) 등이 『태조실록』,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 『태종실록』을 수개할 것을 청하여 삼대 실록을 수정하여 편찬하고, 1445년(세종 27) 각 4본씩 만들어 춘추관 실록각·충주사고·성주사고·전주사고에 나누어 보관하니, 처음으로 조선조 실록을 4대 사고에 봉안한 것이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7월에는 영릉비문(英陵碑文, 세종대왕 신도비문)을 춘추관 실록각·전주사고·충주사고·성주사고에 갈무리하도록 명하여 충주사고에 영릉비문도 보관되었다. 1455년(단종 3) 1월에는 『이문등록(吏文謄錄)』4권, 『조칙(詔勅)』1권, 『일본국서계(日本國書契)』1권, 『일본국대내전서계(日本國大內殿書契)』1권, 「중조방문(中朝榜文)」 등이 충주사고에 보관되었다. 1457년(세조 3) 3월에는 『선원록(璿源錄)』, 승정원·의정부·육조·사헌부·사간원·예문춘추관의 문서를 필사하고, 우리나라에서 편찬한 책들, 여러 학자들의 문집, 여러 고을에 있는 서적들을 모두 사들이고, 또한 『송사(宋史)』·『원사(元史)』도 필사하여 이들을 충주사고에 보관하였다.

1482년(성종 13) 2월에 올린 양성지(梁誠之)의 상소에 의하면, 『삼국사기(三國史記)』,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전사(高麗全史)』, 제사·제읍의 『노비정안(奴婢正案)』, 『속안(續案)』도 충주사고에 있었으나 『단종실록(端宗實錄)』을 충주사고에 봉안했다는 기록은 없다. 『세조실록(世祖實錄)』과 『예종실록(睿宗實錄)』이 1471년(성종 2)과 1472년(성종 3)에 각각 완성되니 1473년(성종 4)에 강희맹(姜希孟)을 파견하여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1499년(연산군 5) 3월에는 『성종실록(成宗實錄)』이 완성되어 3일 뒤인 3월 15일에 참찬(參贊) 홍귀달(洪貴達)과 병조참판 권건(權健)으로 하여금 외사고에 봉안토록 하였다. 이때 당연히 충주사고에 『성종실록』이 봉안되었다. 1509년(중종 4) 9월에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찬집이 끝나고 바로 봉심사(奉審使)로 하여금 외방 3사고에 봉안하도록 하였다.

사고에 봉안된 실록이나 수장된 서적들은 포쇄나 봉안 때 형지안(形止案)을 만들어 보고하였다. 형지안은 포쇄(曝曬) 기록이나 사고에 보관된 서적의 목록이 기록된 것으로 충주사고의 형지안은 현존하는 것이 없고 현존하는 사고의 형지안은 1588년(선조 21) 9월 1일에 포쇄별감인 춘추관기사관 김홍미(金弘微)에 의하여 작성된 『전주사고포쇄형지안(全州史庫曝曬形止案)』이 규장각에 남아있는 최고의 것이다. 이때 충주사고의 포쇄형지안도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전주사고포쇄형지안』에 수록된 실록이나 서책도 충주사고에 수장되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전주사고의 형지안을 간추려 봄으로써 충주사고에 수장된 서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조실록』15권, 『정종실록』6권, 『태종실록』36권, 『세종실록』163권, 『문종실록』13권, 『노산군일기』14권, 『세조실록』49권, 『예종실록』8권, 『성종실록』297권, 『연산군일기』63권, 『중종실록』105권, 『인종실록』2권, 『명종실록』34권 등 조선 전기 13왕의 실록 805권이 보관되었다. 『수시력입성』상 등 34책, 『역대병요(歷代兵要)』3건, 『고려사』 열전 등 64책, 『고려사』 목록·연표·세가·열전 등 70책,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35책, 『국조보감(國朝寶鑑)』3권, 『고려전사목표(高麗全史目標)』43책, 『공안(供案)』8책, 『고려전사도표(高麗全史釖標)』47책, 『고려사』 등 45책, 『어제병장설(御製兵將說)』 등 12건, 각년 형지안 등이 보관되었다. 이보다 3년 후인 1591년(선조 24)에 만들어진 포쇄형지안에는 『초학자회(初學字會)』2건 2책이 증가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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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사고에 봉안된 조선 역대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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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충주사고에 보관된 서적 및 문적

[사고의 관리]

역대 실록을 위시한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사고이니만큼 그 관리는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사고는 소재하는 도의 관찰사나 목사의 관할 하에 두었지만 전담하는 관원을 배치하였다. 관리 관원으로는 수호관(守護官) 5원, 별색(別色) 1원, 호장(戶長) 1원, 서기(書記) 1원, 고직(庫直) 1원 등 총 9명었다. 이들 전담 관원의 사고 관리 업무는 화재와 누수 방지, 외적의 침입 대비, 서책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포쇄, 실록의 봉안, 사고의 개패 등이 있었다.

[사고의 소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동래를 점령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길은 중도로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을 경유하여 상주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길은 좌도로 장기·기장을 거쳐 좌병영(左兵營)인 울산을 함락시키고 경주·영천·신령·의흥·군위·비안을 지나 용궁의 하풍진을 건너 문경으로 진출해서 중도의 군사와 합류, 조령을 넘어 충주로 침입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1592년(선조 25) 4월 17일 이일을 순변사(巡邊使)로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고, 이어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아 이일의 군사를 응원케 하였다. 신립이 충주에 도착하니 충청도 군·현의 군사 8,0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신립은 4월 28일 아침에 군사를 인솔하고 탄금대에 나가 배수진을 쳤다.

왜군은 길을 나누어 대진(大陣)은 곧바로 충주성으로 들어가고 좌군(좌익)은 달천 강변을 따라 내려오고 우군(우익)은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가서 상류를 따라 진격했다. 조선군은 진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왜군의 포위 공격에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군사들은 처음부터 사기가 저하되어 싸울 용기도 없이 밀리어 달천강 물에 뛰어드는 등 크게 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의 패배로 충주시가는 불타고 충주시가에 있던 충주사고도 소실되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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