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031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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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州州城戰鬪 |
영어의미역 | Chungjujuseong Fortress Batt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최일성 |
성격 |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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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256년 4월 |
종결연도/일시 | 1256년 |
발생(시작)장소 | 충주주성 |
[정의]
1256년(고종 43) 4월 충주주성에서 고려군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역사적 배경]
고려와 몽고가 처음 접촉한 것은 1219년(고종 6) 고려가 강동성(江東城)에 있는 거란족을 평정할 때 몽고의 후원을 얻어 공동 작전을 취했을 때이다. 이 일을 빌미로 이후 몽고는 고려에 대한 은인을 자처하며 사신을 보내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였다.
1225년(고종 12) 1월 몽고의 사자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서 공물을 거두어 귀국하던 중 압록강 변에서 도적떼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몽고는 이 사건의 책임을 고려에 물으며 국교를 단절하고, 이것을 구실로 1231년(고종 18) 8월 고려를 침입하기 시작하여 1258년 강화를 맺을 때까지 여덟 차례에 걸쳐 국토를 유린하였다.
고려는 몽고와의 장기전을 계획하고 이듬해인 1232년(고종 19)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 여러 지역에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에게 적이 침입하면 섬이나 산성으로 옮기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몽고군을 맞아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싸운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각 지방의 향리와 농민, 천민 등이었다. 특히 지방에서 이루어진 대몽 항전 중 충주는 몽고의 침입이 사실상 끝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쟁이 전개되었던 특별한 지역이다. 이 지역 또한 몽고군을 맞아 싸운 주체는 정부군이나 관원들이 아니라 관노, 소민(所民) 등 충주의 주민들이었다.
[경과]
몽고군이 충주를 함락하여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할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충주주성을 공격하자, 충주 주민은 충주주성에서 몽고군을 맞아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노약자를 미리 충주 인근의 월악산성으로 피난시켰다.
[결과]
몽고군에 의해 충주주성은 철저히 도륙되었다. 몽고군이 충주주성을 도륙한 뒤 충주 주민이 피난하여 있는 월악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홀연히 운무가 끼고 바람과 비, 우레와 우박이 함께 들이치니 몽고군은 신의 도움이라 생각하고 공격하지 않고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