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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903227
한자 金自粹
영어의미역 Gim Jasu
이칭/별칭 순중(純仲),거광(去磺),상촌(桑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최일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무신|충청감사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시
성별
생년 1351년(충정왕 3)연표보기
몰년 1413년(태종 13)연표보기
본관 경주
대표관직 대사성|형조판서

[정의]

고려 후기 충청감사를 역임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중(純仲), 호는 상촌(桑村). 아버지는 통례문부사·지제고를 지낸 김오(金珸)이다.

[활동사항]

1370년(공민왕 19)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병구완을 하였다. 어머니가 별세한 후 3년 시묘를 살아 정려를 받았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덕령부주부가 되었다.

우왕 초 정언 재직 중 왜구 토벌의 공으로 포상 받은 경상도도순문사 조민수(曺敏修)가 올린 사은 편지에 대한 교서를 지으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전날 조민수가 왜구와 싸우다 도망을 쳐서 많은 병사들을 죽게 한 사실을 들어서 교서 작성을 거절한 죄로 전라도 돌산에 유배되었다. 뒤에 유배에서 풀려나 전교부령(典校部令)을 거쳐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를 지냈다.

공양왕 때 대사성,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을 지내면서 왕대비에 대하여 효성을 다할 것, 세자의 봉숭례(封崇禮)를 서두르지 말 것, 사전(祀典)에 기재된 바를 제외하고는 일체의 음사를 금지하고 무당의 궁중 출입을 엄단할 것, 천변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숭불로 인한 것이니 연복사 탑의 중수 공사를 중지할 것, 언관의 신분을 보장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이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좌상시, 충청감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나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일체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은거하였다. 조선 건국 후 태종이 형조판서로 임명했으나 응하지 않고 자손에게 무덤을 만들지 말라 유언하고 자결하였다.

그러나 『태조실록(太祖實錄)』과 『태종실록(太宗實錄)』에 의하면 1397년(태조 6) 청주목사로 구휼에 힘썼고, 1401년(태종 1) 좌우산기상시를 거쳐 1406년 충청감사에 임명되어 충주감영으로 부임하였으며, 1411년 판강릉도대도호부사로 재직 중 1413년(태종 13) 별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묘소]

김자수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120-1번지에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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