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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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서울 토박이이며 한때는 노인을 위한 봉사단체인 은십자 운동본부의 사무국장과 본부장을 역임하셨다는 정무후 씨. 자신이 노인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도 않았는데 어느덧 자기가 노인네라며 껄껄 웃으시는 모습이 세련되면서도 중후한 멋을 풍긴다. 그의 고향은 두 군데라고 한다. 한 곳은 서울이고, 또 하나는 여기 미륵리라고 망설임없이 말한다.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서울에서 나름대로 국가와 민족이 요구하는 일을 앞장서서 수행하였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이 마을을 위해서라면 조금이라도 힘이 된다면 어떠한 일이든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마을을 위해서라면 심부름을 기꺼이 하겠단다. 미륵리 토박이보다도 더 미륵리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정무후 씨가 미륵리를 찾은 것은 약 20여 년 전, 이 미륵리에 고려 때부터 채굴한 자수정 광산이 있어 수정 광산을 운영해 보고자 들어 왔단다. 고려시대에 채굴했다는 고려굴을 보면 높이 7~8m의 굴로 밑, 옆에 수정이 꽉 차있어 수정을 많이 채굴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곳의 수정은 자수정으로 강도가 약 8.5정도로 타 지역의 수정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단다. 그는 수정 광산에 손을 댔지만, 국립공원법의 적용으로 곤란에 봉착하게 되었단다. 즉, 국립공원법에 의하여 공원지구 내의 광산은 채굴 허가 범위가 300평으로 그 외에는 절대 못 건드린단다. 수정이 나오면 그 맥상을 따라 캐들어 가야 하는데 또 허가를 얻으려면 최소한 1년 이상이 걸려야 했으니 조금 일하다 쉬고 또 허가를 얻어 조금 일하다 쉬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집어 치웠단다. 허가 문제만 해결되면 지금이라도 다시 하고 싶단다.
당시는 미륵리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관광객들이 꽤나 들어오던 시기였고 민박도 잘 되었고, 시내버스도 지금과는 달리 미륵사지 앞으로 통과하던 시기이어서 식당을 차렸단다. 수정식당이라 간판을 내걸고 시작한 식당, “왜냐하면 서울에서 친구들이 찾아오니 차도 내고 밥도 해야지, 그럴 바엔 차라리 식당을 차리자” 란 심정이었단다. 지금은 미륵가든이라고 간판을 바꾸었고 현재 수안보면 요식업조합 조합장 직도 맡고 있다.
그는 미륵리를 고향이라고 한다. 미륵리 주민들을 정말 사심없고 착한 이들이라고 평가한다. 미륵리는 산으로 폭 싸여 있어 예부터 밖의 영향을 덜 받아 순수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고진’들만 사는 곳이라고 한다. 산에 올라 미륵리를 보면 풍수적으로 산세가 좋단다. 서울의 친구, 지인들이 처음 찾아 왔을 때 저녁에 오는 사람은 납치당하는 줄 알았단다. 수안보에서부터 가도 가도 컴컴한 산중으로 계속 들어가기에….
요즘 친구들은 그를 일러 신선이라고 한단다. 이렇게 좋은 곳에 산다고… 그는 좋은 공기 마시며 옛적 화려함을 접고 농촌의 구수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미륵리에는 정무후 씨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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