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C02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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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1932년 풍덕과 성동이 힘을 모아 공동으로 공회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풍덕마을의 이칠영(李七榮)이 제내리 303번지의 밭 200평을 부지로 희사함으로써 풍덕마을에 세우게 되었다. 풍덕에서는 방풍림계에서 건축비의 반액(62원 50전)을 지불하였다.
그 후 1934년에는 동네의 학생들이 멀리 용원과 대소원으로 통학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자 사립학교를 건립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에 방풍림계에서는 공회당을 수리하여 학생들을 위한 교사(校舍)로 쓰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설립된 것이 제내리 사립학교이다. 이 학교는 겨울에 난로까지 마련하며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다가, 1944년 신중리에 주덕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폐교되었다.
폐교 후 이 건물은 1947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공회당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에 공공의 사무마저 구매점 사랑방을 쓰게 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고자 1950년 11월 5일 다시 건립을 위한 논의를 시작 하였다. 전쟁 중이라는 이유로 반대하는 이도 있었으나 협의가 이루어져 방풍림계에서 백미 2가마를 얻었다. 그러나 이듬해 정월 7일(1·4후퇴 시) 피난이 시작되어 그 쌀을 땅에 묻고 갔다 와 보니 타 지역 피난민들에 의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방풍림계에서는 공회당 건축비를 마련하기 위해 또다시 백미 4가마를 지원하였고, 마을 주민들 역시 달천 복구공사에 참여하고 받은 노임 등을 모았다. 5월 29일 공사비로 쌀 13가마가 마련되었으므로 건립 공사를 맡겼다. 그러나 처음 부지를 내놓았던 당사자가 갑자기 부지 희사를 철회하는 바람에 한동안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이근호가 자기의 터를 내주겠다고 하여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1년여의 공사 끝에 마침내 1952년 5월 22일 공회당 건물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 공회당은 이후 20여 년간 야학은 물론 앰프시설, 농협의 조직, 구판장 개설, 지역사회 개발회의 조직, 외국 손님의 접대 등 마을 회의와 토론의 산실이자 풍덕마을 발전을 위한 전당이 되었다. 그 후 공회당은 1971년 풍덕회관이 건립됨으로써 매각 처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