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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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以興神道碑 |
영어공식명칭 | Memorial Stone for Nam Iheu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남기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76년 - 남이흥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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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627년 - 남이흥 사망 |
건립 시기/일시 | 1714년 5월 - 남이흥 신도비 건립 |
이전 시기/일시 | 1971년 3월 1일 - 남이흥 신도비 이건 |
현 소재지 | 남이흥 신도비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73-54[대호지면 도이리 373-1] |
원소재지 | 남이흥 신도비 - 경기도 성남시 중부면 탄리 |
성격 | 신도비 |
관련 인물 | 남이흥(南以興) |
재질 | 석물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90㎝[전체 높이]|250㎝[비신 높이]|101㎝[비신 너비]|36㎝[비신 두께] |
소유자 | 의령 남씨 충장공파 문중 |
관리자 | 남주현 |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무신 남이흥의 신도비.
[개설]
남이흥 신도비(南以興神道碑)는 1714년 5월 왕명에 의해 좌의정 허목(許穆)이 찬(撰)한 신도비로서, 남이흥이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안주성에서 순직한 내용과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남이흥]
남이흥(南以興)[1576~1627]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갈성분위출기효력 진무공신(竭誠奮威出氣效力振武功臣)이 되었다. 그후 평안병사(平安兵使) 재직 시 청나라 후금(後金)이 3만 6000명의 군사를 동원해 조선을 침공해 오자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혼신을 다해 대적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사태가 어려워지자 적을 화약고 쪽으로 유인하여 화약고에 불을 붙여 많은 적과 함께 자폭하였다. 인조는 남이흥을 국장(國葬)으로 장례하도록 하고 장례 시 곤룡포를 관 위에 덮어 주라며 눈물로 애도하였다고 전한다. 후금 대장 아민도 조차 남이흥이 자폭하는 모습을 보고 '충(忠)의 나라' 라 감탄했고 명나라 황제는 지금의 천안문 앞 광장에 수개월 동안 남이흥의 이름을 써 놓고 명나라 신민들에게 충절을 본받도록 했다.
[건립 경위]
남이흥 신도비는 애국 충절의 상징인 남이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714년 5월 왕명에 따라 좌의정 허목이 지은 글을 돌에 새겨 세웠다. 원래는 묘소와 함께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부면(中部面) 탄리(炭里)에 있었는데 1971년 7월 성남 단지[현 경기도 성남시청 자리] 조성에 따라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사 입구로 옮겨 세웠다.
[위치]
남이흥 신도비는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충장1길 73[도이리 374-2] 충장사 사당 입구에 있다.
[형태]
남이흥 신도비의 높이는 세로 250㎝, 가로 너비 101㎝, 두께 36㎝이고, 지붕돌을 포함한 전체 높이는 290㎝이다.
[금석문]
허목이 찬한 내용으로 남이흥의 업적, 이괄의 난 평정 내용, 정묘호란 때 순국한 행적 등을 알 수 있다. 기록문은 『남이흥 장군 유사록』에 있으며, 신도비 탁본은 모충관(慕忠館)에 보존되어 있다.
[현황]
남이흥 신도비는 석질이 좋지 않은 데다가 자연 풍화에 마모되어 한문으로 쓰인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매년 후손들이 모여 순국일인 음력 1월 21일에 "불천위" 제향을 하고 있다. 또한 "남이흥 장군 문화제"를 탄신일인 9월 10일에 맞춰 매년 당진시내와 충장사 경내에서 진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627년 인조는 남이흥을 국장으로 장례토록 하고 장례 시 친히 곤룡포를 관 위에 덮어 주며 애도하였다. 1714년 숙종은 남이흥에게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남이흥의 애국 충절을 후손 만대 기리고자 하는 두 임금의 뜻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