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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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桃湖義塾 |
영어공식명칭 | Dohouisook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남기은 |
폐교 시기/일시 | 1930년 - 도호의숙 폐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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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설립지 | 종숙 - 해미현 서면 도촌 강당 |
주소 변경 이력 | 도호의숙 - 충청남도 서산군 대호지면 도이리 |
주소 변경 이력 | 도호의숙 - 충청남도 당진군 대호지면 도이리 |
성격 | 근대 교육 기관 |
설립자 | 남석구|남보영|남계옥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
[교육 목표(교훈 포함)]
도호의숙의 교육 목표는 애국·충절을 바탕으로 한 민족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변천]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강당(講堂)골에 있던 도호의숙(桃湖義塾)은 남이흥(南以興)[1576~1627] 장군의 후손인 의령 남씨(宜寧男氏) 종중에서 그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종숙(宗塾)으로 시작되었다. 종숙은 충장공 남이흥의 8대 종손이며, 의령 남씨 21세 손 남석구(南錫龜)[1798~1868]와 그의 조카 남보영(南普永) 그리고 남계옥(南啓沃)에 의하여 1850년대 초에 이루어 진것으로 짐작된다.
남보영의 아들 5형제가 모두 무과에 급제하면서 무과 급제자 남규희(南圭熙)[1852~1902]와 백파(栢坡) 남택희(南宅熙)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문호를 개방하면서 타성(他姓)도 함께 교육할 수 있도록 하여 도호의숙(桃湖義塾)으로 개편하였다. 화서 이항로(李恒老) 학파의 유학자 유중교(柳重敎)의 제자인 존재(存齊) 유진하(柳鎭河)와 그의 제자인 직암(直菴) 이철승(李喆承) 등 유학자들을 초빙하여 한학을 비롯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종숙 출신으로 무과 등과(武科登科)자는 남이흥의 후손 20명이 배출되었으며, 도호의숙 출신들은 일제 강점기 대호지 4·4 만세 운동의 주역으로 이어졌다. 뒤이어 도호 학당으로 학맥을 이어오다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된 후 도이리 강습소로 이어 오다가 1930년에 이 마저도 폐쇄되었다.
[교육 활동]
도호의숙은 한학 뿐만 아니라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으로 다수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우선 당진 가학리 출생으로 성균관장을 지낸 이재서(李載瑞)와 한학자 이병태를 비롯하여 의령 남씨 삼학사 삼명창이 도호의숙 출신이다. 또한 남상락, 남계창, 남주원, 남상돈은 고종 황제 인산일에 파고다 공원 3·1만세 운동 참여한 후 고향인 당진에 내려와 천의 장터에서 4·4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남이흥 후손 중 도호의숙 출신의 독립 운동가로 건국 훈장 수훈자 17인을 배출하였다. 도호의숙에서 수학한 극제 남상혁이 지산 김복한 문하에서도 수학하면서, 김복한과 그의 제자 한용운, 김좌진 등도 당진 대호지면 사성리·도이리를 많이 왕래하였다.
[교가와 상징물]
도호의숙에서 교재로 만들어 사용하던 『화서집』·『성제집』·『지산집』·『직암집』·『여인 교육 유인집』·『송자대전』 등 수 많은 분량의 서책, 간찰, 시문 등이 있다.
[현황]
명문 도호의숙에서 교재로 만들어 사용하던 교재들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충장사 경내 모충관에 보존되어 있다. 도호의숙의 교실로 사용하던 도이리 강당(講堂)은 없어지고 강당골에는 민가(民家)와 지명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