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0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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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州崔氏 |
영어공식명칭 | Haeju Choesi|Haeju Choe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남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7년 3월 11일 - 해동 영당 개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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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해주(海州) - 황해도 해주 |
입향지 | 해주최씨 당진 입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 |
세거|집성지 | 해주최씨 당진 세거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 |
묘소|세장지 | 해주최씨 당진 세장지 -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 |
성씨 시조 | 최온(崔溫) |
입향 시조 | 최순형(崔順亨) |
[정의]
최온이 시조이고 최순형이 입향조인 충청남도 당진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해주최씨(海州崔氏)의 시조는 최온(崔溫)이고, 당진 입향조는 16세기 인물인 계공랑(啓功郞) 최순형(崔順亨)이다. 최순형의 후손들은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에 세거지를 형성해 400여 년을 이어 오고 있다. 후손들은 해동공자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984~1068]의 영정을 모신 ‘해동 영당(海東影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연원]
해주최씨 시조 최온은 해주의 목민관을 역임하였고 고려 성종 때 판리부사(判吏部事)를 지냈는데, 많은 재화를 이용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지방관의 탐학을 막아 백성을 학정에서 구했다고 전해진다. 해주를 관향으로 삼게 된 연유는 최온의 선대 이래로 해주에서 세거지를 이루었기에 정해졌다. 해주최씨가 고려 때 국성(國姓)이라고 할 만큼 굳건한 기틀을 마련한 것은 최충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 데에서 비롯된다.
최충의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해주최씨 시조인 최온의 아들이다. 1005년(목종 8) 과거의 갑과에 장원 급제하고 청직(淸職)을 두루 거쳤고, 72세에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수상직 9년을 포함해 20여 년간을 조정의 최고위직에 있으면서 국정을 좌우했다.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임금을 섬겼고, 의유(懿儒), 수정(綏靖) 등 11개의 공신 칭호를 받기도 했다. 고려의 문물 제도를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최충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도 ‘구재 학당(九齋學堂)’이라는 사학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최충은 83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후학을 지도하였는데 구재학당은 최충의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최충은 공자의 교육 사상에 근거하여 차별을 두지 않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여생을 바쳐 국가의 교육과 문학을 크게 진작시킴으로써 ‘해동공자(海東孔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해주최씨는 45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으나 벼슬보다는 문장과 충의의 가문으로서 그 명성을 유지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선조 때 경성 부사를 지내고 시와 문장에 능통했던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을 들 수 있으며, 충의로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사수하다 김천일 등과 함께 장렬하게 순국한 최경회(崔慶會)를 들 수 있다.
[입향 경위]
시조 최온의 14세손인 최순형이 해주에서 당진시 송산면 무수리에 입향하였다. 입향 시기는 1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입향 경위는 알 수 없고, 최순형이 입향할 때 최충의 영정을 모시고 왔다고 전한다.
[현황]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에 거주하는 해주최씨는 대령군파(大寧君派)다. 최순형이 입향한 지 400년에 이르고 현재 31세손이 이르고 있다. 이들은 송산 면내에 골고루 분포하여 한 때 100여 호가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가 대도시로 전출하여 현재 송산면 무수리에 6호, 유곡리에 23호, 가곡리에 5호가 세거지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또한 문중 사람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면서도 학업에 몰두하여 많은 유명 인사를 배출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건국대 교수인 이학 박사 최무웅, 당진군의회 전의장 최동섭이 있다.
[관련 유적]
최충의 영정은 1535년(선조 8)에 ‘면천 영당(沔川影堂)’을 세우고 봉안되었다. 그러나 이후 영당의 유지 관리에 어려움을 겪던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수년간 모은 전곡을 바탕으로 1967년 3월 11일에 영당을 개축하였다. 이때 영당의 명칭을 ‘해동 영당’으로 고쳤다. 또한 1981년 3월에는 옛 영정이 너무 훼손되어 원본은 별도로 봉안하고 새로운 영정을 제작하여 봉안하였다. 해동 영당은 1993년 5월 21일 당진시 지정 향토 유적 제3호로 등록되었다.
해동 영당에서의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음력 1일~10일 사이의 날 중 천간이 정(丁)으로 된 날]에 당진의 유림과 후손들이 함께 지냈다. 그 후 1984년부터 유림에서 경모회(敬慕會)를 조직하여 유지, 관리하였으나 현재는 여러 가지 사정상 후손들만 제향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