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401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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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夜學運動 |
영어공식명칭 | Night School Movement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당진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남석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당진 지역에서 빈곤 주민과 어린이를 위해 시행하였던 교육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식민지 제도권에서 소외되어 공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주민과 어린이를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야학이었다. 야학은 일제의 공교육 제도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한 형태로, 1919년 3·1 운동 이후 급격하게 확대되었고 1930년대 전국적으로 크게 활성화되었다. 야학의 성향은 설립자의 교육적인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당시 야학의 주체는 지방 유지, 노동자·농민 단체, 청년회, 종교 단체가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 노동자·농민의 의식 각성과 새로운 근대 지식을 보급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야학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장기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야학운동의 전개]
1910년대 당진 지역의 공교육은 1911년에 설립된 면천 공립 보통학교[현 면천 초등학교]와 1913년에 설립된 당진 공립 보통학교[현 당진 초등학교] 등 두 곳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당진 지역 주민들은 일제가 세운 학교에 자녀를 보내는 것을 꺼려 하였다.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체제에 대한 항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서당을 위주로 전개되던 전통 교육에 대한 존숭(尊崇)이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개되면서, 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인식 태도가 달라졌다.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자는 무장 투장 노선과 함께 실력 양성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력 양성 운동은 우리 민족이 실력을 양성해야 일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지역 유지와 지식인들에게 크게 유행되었고, 당진 지역에서도 크게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당진 지역 각 면단위마다 공립 보통학교를 세워 나갔고, 각종 야학을 설립하여 빈곤한 어린이를 교육시키기 시작하였다. 『동아일보』 1929년 1월 12일자에 보도된 당진의 교육 기관을 중심으로 살펴본 당진 지역의 야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노동 학원(勞動學院) : 1919년 7월 1일 송악면 기지시리에 설립하였다. 설립자는 박준일(朴準一)이며 설립 시 학생 수는 32명, 1929년 학생 수는 26명, 교사는 2명이며 원장은 설립자인 박준일(朴準一)이다.
2) 영화 학원(永化學院) : 1921년 9월 1일에 설립되었으며 설립자는 유진태(兪鎭泰)이다. 장소는 우강면 창리로 현재 우강면사무소의 예전 재래식 가옥이다. 설립 시 학생 수는 80명이며, 1929년 학생 수는 151명이다. 교사는 2명이며 원장은 설립자인 유진태이다. 영화 학원은 이후 운영비 부족을 감당하지 못하고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다. 특히 매월 80원씩 경비를 제공하던 유진태가 1924년경 서울로 이주함에 따라 경영난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우강면은 사회주의 사상의 중심지로 지목되어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다. 주민들은 학원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1925년 11월, 범천면사무소에서 영화 학원 유지계를 조직하였고 운동회를 개최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영화 학원은 1926년 폐교되었고, 1929년 6월 우강 공립 보통학교[현 우강 초등학교]가 개교하면서 학생들을 흡수하였다.
3) 당성 학원(唐城學院) : 1922년 4월 당진면장 이춘세(李春世)가 당진 향교 명륜당에 설립한 야학이다. 이 학원은 학생이 100여 명에 이르는 등 성황을 맞았다. 이춘세는 학원 운영비 조달을 위하여 충청남도 당국에 호소하기도 하고, 지역 유지 단체인 이문 구락부에서 의연금을 모금하였다.
4) 면양 학원(沔陽學院) : 1923년 당진군 면천면 성상리에 설립된 사립 학원이었다. 당시 면천면에는 면천 공립 보통학교가 있었으나 입학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많았다. 이에 면천 지역 유지 50여 명이 교육 협성회를 조직하고 회원들에게 매년 보리 닷 되, 벼 한 말을 거두었다. 이들은 면천 향교 건물을 교실로 사용하였으나 1923년 11월 건물을 새로 세우고 이전하였다. 면양 학원의 원장은 면천의 대지주였던 박종열이었다. 면양 학원은 근근이 명맥을 유지했으나 금융 조합에 차입하여 쓴 돈을 갚지 못하는 등 난항을 겪다가 폐교되었다. 폐교 시기는 알 수 없다.
5) 영신 강습회(永新講習會) : 1925년 4월 1일 합덕면 신리에 설립되었으며 설립자는 박병렬(朴炳烈)이다. 설립 시 학생 수는 60명이며, 1929년 학생 수는 40명이다. 교사는 2명이며 회장은 박경래(朴慶來)이다. 합덕면 신리는 합덕의 동남쪽으로 예산군과의 경계선에 위치하여 통학이 매우 불편하였다. 설립자 박병렬은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였다. 그는 당시 4만 원을 기부하여 20여 칸에 이르는 교사(校舍)와 부속 건물을 짓게 하였다. 영신 강습회는 합덕 공립 보통학교 부설의 신리 간이 학교가 1934년 세워지면서 폐교되었다. 강습회가 사용하던 3천여 평의 학교 부지와 건물, 각종 기자재는 모두 신리 간이 학교에 인수되었다. 박병렬은 간이 학교의 설립 추가 비용을 모두 부담하였다. 지역 주민들은 박병렬의 자선에 감동하였고, 1935년 5월 기념비를 제작하여 교정에 세웠다. 또한 1938년 6월에는 박병렬 동상을 제작하여 학교 후원에 세웠다. 하지만 박병렬 동상은 일제의 공출제 시행과 함께 수탈당했고 오늘날 동상 대석만 남아 있다.
6) 덕흥 학원(德興學院) : 1926년 5월 1일 당진면 대덕리에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이종억(李鍾億)이며, 설립 시 학생 수는 17명, 1929년 학생 수는 16명이다. 교사는 1명이며 원장은 이□노(李□魯)이다.
7) 배영 학원(培英學院) : 1928년 3월 21일 당진 읍내리에 설립되었다. 설립자는 한운교(韓雲敎)이며, 설립 시 학생 수는 36명, 1929년 학생 수는 21명, 교사는 2명 원장은 설립자인 한운교(韓雲敎)였다.
당진의 당시 야학 현황은 다음과 같다.
노동 학원은 박준일이 1919년 7월 1일 송악 기지시리에 32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9. 1. 12).
송산 강습소는 김형태가 1921년 송산면 금암리에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1. 7. 14).
숙명 사숙은 이춘세가 1921년 5월 15명의 생도로 당진 향교에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1. 10. 19).
영화 학원은 정철호가 1921년 우강면사무소에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3. 7. 16).
당성 학원은 이춘세가 1922년 4월 당진 향교에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23. 4. 25).
송남 학원은 구자승이 1922년 송악면 가교리에 70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23. 6. 4).
면양 학원은 박종열이 1923년 면천 향교에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3. 4. 11).
삼일 강습소는 인양수가 1923년 석문면 삼봉리에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23. 6. 14).
삼화 강습소는 인근식이 1923년 석문면 삼화리에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23. 6. 14).
미산 학원은 1924년 순성면 성북리에 설립되었다(『조선일보』, 1924. 8. 26).
영신 학원은 박병렬이 1925년 합덕 신리에 50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시대일보』, 1925. 6. 4).
삼호 야학회는 홍병철이 1925년 합덕면 대합덕리에 설립하였다(『시대일보』, 1925. 12. 10).
송산 노동 야학은 최용우가 1925년 송산 공보교에 60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5. 12. 18).
당진 노동 야학은 당진 청년이 1925년 당진면 읍내리에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5. 12. 19).
덕흥 학원은 이종억이 1926년 5월 1일 당진 대덕리에 17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9. 1. 12).
배영 학원은 한운교가 1928년 3월 21일 당진 읍내리에 36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동아일보』, 1929. 1. 12).
신평 한글 야학은 구완서가 1932년 신평면 남산리에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32. 3. 14).
부장 한글 야학은 강춘식이 범천면 부장리에 40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32. 3. 27).
송산 한글 야학은 안구호가 범천면 송산리에 25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32. 3. 27).
원치 한글 야학은 정규호가 범천면 원치리에 12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32. 3. 27).
내경 한글 야학은 김종렬이 범천면 내경리에 15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32. 3. 27).
성원 한글 야학은 황영재가 범천면 성원리에 9명의 생도로 설립하였다(『조선일보』, 1932. 3. 27).
기업 전습소는 이종애가 1935년 당진면 읍내리에 설립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35. 10. 12).
[의의와 평가]
일제 강점기 당진 지역은 충청남도 서북단의 궁벽한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유지와 부호, 지식인을 중심으로 야학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거나 의연금을 모금하여 건물을 세우고 교사를 초빙하였으며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쳤다. 학생들은 학비가 없어서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어린이가 대다수였으며, 거리가 멀어서 학교에 등교할 수 없는 어린이도 많았다. 특히 교육의 사각지대에 해당하던 여자아이와 문맹자를 위한 야학도 설립되었다.
1930년대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과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이 전개되면서 야학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35년 심훈이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 필경사에서 심재영을 모델로 『상록수』라는 소설을 완성했듯이, 야학을 중심으로 하는 농촌 계몽 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었다. 이와 같이 당진 지역 야학운동은 엄혹했던 일제 강점기에 문맹 퇴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근대 의식을 심어주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