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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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堂-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권선경 |
의례 장소 | 우이 고개 도당앞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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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마을 신앙 |
의례 시기/일시 | 음력 2월 초닷새 안 |
신당/신체 | 도당|서낭당|도당바위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원당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원당마을 도당굿 은 2월 초순의 닷새 안으로 택일한 날에 당주 무당을 초빙하여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지내던 굿이다. 음력 2월 초순의 닷새 안에 굿을 해야 하기 때문에 정월 그믐날쯤 굿 날을 잡았다. 현전하고 있는 삼각산 도당굿처럼 당주 무당을 비롯한 여러 무당들이 주재하던 큰 마을굿이었는데, 도당굿을 하던 산이 개발되면서 당집이 소실되고, 굿터 역시 출입 금지 구역으로 묶이면서 전승이 끊겼다.
[연원 및 변천]
원당마을의 도당굿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정확한 연원을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연원을 지니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경로당에 모인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모두 도당굿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행하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집은 우이 고개[도당재: 굿을 하는 신당이 있던 고개]에 있었고, 서낭당이라고 했다. 당집 앞에 당굿을 하던 커다란 터가 존재했고, 당집이 있던 곳에서 조금 올라가면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존재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마을의 어떤 사람이 당집을 훼손하고, 뒤에 산이 개발되면서 굿터까지 출입 금지가 되면서 산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당굿의 전승이 끊겼다. 현재는 나무가 우거지고, 철조망으로 굿터에의 출입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당집 터와 굿터를 찾기 어렵다.
[신당/신체의 형태]
우이 고개에 당집[도당], 당집 옆에 신목(神木)과 신암(神岩), 그 앞에 굿을 하던 도당 굿터와 당집 위의 산신을 받아 오던 산신 제단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집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훼손되었고, 이후 산이 개발되면서 굿을 하던 장소 자체의 출입이 금지된 상태이다.
[절차]
음력 정월 그믐쯤 날짜를 잡아 음력 2월 초닷새 안으로 굿을 하였다. 굿 경비는 벼 한 말씩이었는데, 뒤에는 돈으로 냈다고 한다. 도당굿의 제관은 각 마을에서 반장 1명씩과 도화주, 이화주, 삼화주를 뽑았다. 제관으로 뽑힌 사람은 마을 사람들 중에 부정이 없는 사람들을 콩에다 이름을 써서 됫박에 넣고 흔들어 뽑았다. 제관 중 도화주의 집에서 술을 담그는 등 제물을 장만하고, 이화주와 삼화주는 이를 도왔다.
도당굿의 당주 무당은 ‘모래내 만신→ 갑진이 할머니→ 꽃방집 할머니’ 등으로 이어졌다. 도당굿은 먼저 산신제를 끝낸 후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행해졌다. 원당마을 도당굿은 ‘사냥거리’와 ‘무감서기’ 등 서울 마을굿의 특징적인 면모를 그대로 보여 주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부대 행사]
원당마을 도당굿 이 있던 날은 엿장사가 와서 엿을 파는 등 대동 잔치로 대단했다고 한다. 원당마을 도당굿을 하면 이웃 마을인 우이동과 도당말에서도 오고, 친척들도 와서 엿도 사 먹고, 음식도 먹고, 무감도 섰다고 한다.
[현황]
원당마을 도당굿 의 전승이 끊기자 마을에 있는 은행나무 앞에서 10여 년 전부터 ‘원당마을 행목대신제’를 마을 제사로 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