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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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牙箏散調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진경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 아쟁산조의 예능 보유자 박종선 광주 시립 국악원에서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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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2년 - 아쟁산조의 예능 보유자 박종선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공연 참가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5년 - 아쟁산조의 예능 보유자 박종선 독일 백림 예술제 참가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 아쟁산조의 예능 보유자 박종선 중남미 순회공연 참가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7년 - 아쟁산조의 예능 보유자 박종선 한일 친선 문화 교류 공연 참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3월 5일 - 아쟁산조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9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아쟁산조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재지정 |
거주지 | 박종선 거주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 3동 |
문화재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아쟁으로 산조 가락을 연주하는 독주곡.
[개설]
아쟁산조 는 아쟁으로 연주하는 민속 기악 독주곡으로 감성적 표현력이 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산조는 기악 독주곡 형식을 지칭하는 용어로 19세기 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가야금의 곡으로 처음 짜였으나 아쟁과 같은 다른 악기들의 특성에 따라 독립된 악곡으로 연주되었고 산조라는 형식이 독주곡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쟁산조의 경우, 다른 악기들에 비해 청의 바뀜이나 음계의 이동이 제한되어 있는 편인데 활로 문질러 연주하기 때문에 음색의 변화도 다채롭지 못하다. 그러나 음량이 크고 지속적인 음을 내기 때문에 감성적이고 표현력이 강한 음악을 연주하기에 적합하다.
[기능 보유자]
아쟁산조 는 가락을 만든 사람의 이름 뒤에 ‘류’나 ‘제’를 붙여 부르는데 크게 한일섭(韓一燮) 류와 정철호(鄭哲鎬) 류가 있다. 어느 류이든 아쟁산조는 애절한 감정의 농도가 짙게 표현되어 매우 격정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쟁산조로 처음 만들어진 한일섭류는 광복 후에 짜인 것으로 비교적 최근에 구성된 산조이다. 우조와 계면조로 구성된 진양과 중모리, 계면조로 구성된 중중모리와 자진모리가 있다. 한일섭은 쇄납[태평소] 산조로 일가를 이루었는데 한일섭의 가락을 박종선(朴鍾善), 윤윤석(尹允錫) 등이 이어받았다.
박종선류 아쟁산조의 창시자인 박종선은 1941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양친을 모두 잃고 담양의 큰아버지 박동실(朴東實)[1897~1968] 명창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박영실(朴永實)은 명고수(名鼓手) 김동준(金東俊)의 스승으로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박종선의 나이 세 살 때 창극 「일목 장군」을 연습하다가 급사하였다.
박종선은 한일섭의 제자로, 태평소와 함께 아쟁을 사사받은 후 1974년 광주 시립 국악원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다수의 해외 순회공연에 참여하였다. 1982년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 공연, 1985년 독일 백림 예술제, 1987년 중남미 순회공연, 한일 친선 문화 교류 공연에 참여하는 등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최근 서울 전통 예술인상을 수상하였고, 아쟁 독주 등의 여러 음반을 취임하였다. 연주 이외에도 국립 국악원 민속 연주단, 국립 중앙 극장 국립 창극단 음악 감독 등을 지내며 후학 양성을 위해 힘쓰고 있다.
박종선은 한일섭의 10분 정도 길이의 산조에 자신의 가락을 얹어 정리하여 지금의 30분 내외의 박종선류 아쟁산조를 탄생시켰다. 박종선의 아쟁산조는 슬픈 음색과 더불어 보다 짙은 삶의 여정을 보여 준다. 때문에 박종선의 아쟁산조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모를 슬픔에 잠겨 추억을 더듬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거주하는 박종선은 2009년 3월 5일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39호 박종선류 아쟁산조의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