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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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台村里 |
영어음역 | Taechon-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태촌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기동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예부터 마을 뒷산에 있던 산제당이 북극성(北極星)과 이어진다는 속설에 따라 ‘별 태(台)’자와 ‘마을 촌(村)’자를 써서 태촌동(台村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곡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태성(台星)·완동(完洞)·배시내가 통합되어 김천군 곡송면 태촌동으로 개편되었다. 1934년 곡송면과 위량면을 통합하여 신설된 감문면 관할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감문면 대촌동으로 개칭되었다. 1971년 태성이 태촌1동, 완동이 태촌2동, 배시내가 태촌3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태촌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감문면 태촌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에 감천, 남서쪽에 외현천이 흐르고, 두 하천을 중심으로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배시내는 교통 여건이 좋아 일찍이 상권이 형성되었다.
[현황]
태촌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2.56㎢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21세대에 436명(남자 216명, 여자 22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감천을 사이에 두고 아포읍, 서쪽으로 성촌리, 남서쪽으로 개령면 광천리, 북동쪽으로 구미시 선산읍과 이웃하고 있다. 태촌1리·태촌2리·태촌3리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안동 권씨·함안 조씨·김해 김씨 집성촌이다. 동쪽으로 국도 59호선이 감천과 나란히 지난다. 평야가 많아 일찍이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참외 재배가 일반화되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 마을로 배시내·안마·완동 등이 있다. 배시내는 낙동강에서 감천으로 이어지는 수로를 따라 생필품을 실은 배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배가 드나드는 시내’란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1529년(중종 24) 김해 김씨 김정준(金廷俊)이 마을을 개척한 이래 김해 김씨·함안 조씨·안동 권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우회 도로가 나기 전 구 도로를 중심으로 40여 년 전까지 3일과 8일에 제법 큰 규모의 5일장이 섰고, 특히 우시장은 경상북도 일대에서 큰 황소가 가장 많이 거래되는 소전으로 유명하였다.
배시내는 140여 년 전 개령민란이 촉발된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개령민란은 조선 후기 전정·군정·환곡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된 임술농민항쟁의 하나로, 1862년(철종 13) 4월 7일 개령현감 김후근과 향리들의 폭정에 항거해 현민들이 배시내 장터에 모여 봉기한 사건이다. 당시 현민 수천 명이 전날 체포된 시위 모의자 김규진의 석방을 요구하며 부정 축재자 박경주와 이방 우학능, 교수 우해룡 등 다섯 명을 타살하고 동헌과 각종 장부를 불태웠던 김천 지역 최대 규모의 민란이었다.
안마는 마을이 산으로 둘러싸여 바깥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서 붙인 이름이다. 태성이 수해로 유실된 뒤 새로 이루어진 세 마을 가운데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므로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완동은 영월 엄씨가 마을을 개척한 뒤 밀양 박씨가 이주하여 비로소 마을 형태가 완성되었으므로 붙인 이름이다. 인근의 감천이 자주 범람하여 마을의 앞들이 자주 수해를 입는데도 마을만은 피해를 입지 않아 안전한 마을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
완동은 달리 왁사골이라고도 한다. 옛날 마을 앞 탑산(塔山) 아래에 영남의 상인들이 선산을 거쳐 서울로 가는 중요한 도로가 있었는데 마을 앞 굴레고개에 있던 주막에 상인들이 유숙하여 밤낮으로 왁자지껄 소란스럽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1650년(효종 1) 영월 엄씨가 이거하여 마을을 개척한 이래 밀양 박씨·김해 김씨·동래 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완동 앞에 있는 탑산은 재미있는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 마을 앞산에 한 승려가 일꾼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에 절을 세워 탑산이라 하였다. 이후 일대 주민들이 원인도 없이 세상을 떠나자 성난 주민들이 절을 부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