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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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道平里 |
영어음역 | Dopyeo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순분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도촌(道村)의 ‘도(道)’자와 신평(新平)의 ‘평(平)’자를 따서 도평동(道平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성주군 신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소용(沼龍)·후평(厚坪)·평산(坪山)·도촌, 조마면 신평이 통합되어 김천군 감천면 도평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도평1동·도평2동으로 분동되었고, 금릉군 감천면 도평동이 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도평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감천면 도평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에 숫돌봉이 솟아 있고 서쪽으로는 감천이 흐르고 도평평야가 펼쳐져 있다. 마을의 진산인 숫돌봉은 예부터 연장을 연마하는 숫돌의 산지로 유명하다. 숫돌봉에서 마을과 평야를 가로질러 감천으로 합류하는 소하천 제방이 용의 형상을 닮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현황]
도평리는 감천면 소재지인 광기리에서 남쪽으로 약 1㎞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4.05㎢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58세대에 382명(남자 193명, 여자 18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무안리, 서쪽으로 조마면 장암리·신안리, 남쪽으로 용호리, 북쪽으로 광기리와 이웃하고 있다. 도평1리·도평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김천의 대표적인 성주 이씨 집성촌이다. 국도 59호선이 지나고, 평야가 발달하여 예부터 벼농사가 이루어졌고 최근에는 대부분의 농가에서 참외 농사를 짓는다. 문화 유적으로 성주 이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문랑·효랑 이효각(文娘孝娘二孝閣)이 있다.
자연 마을로는 소용·평산·도촌 등이 있다. 소용은 숫돌봉 아래 자리 잡은 마을로 대대로 성주 이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1573년 성주 이씨 밀직공파(密直公派) 12대손 진사 이근동(李根東)이 성주 수륜(修倫)에서 이거해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마을 앞 들판이 지대가 낮아 수시로 침수되어 큰 늪[沼]을 이루고 마을 뒤 숫돌봉의 지세가 풍수지리상 용(龍)의 형세이며 숫돌봉에서 발원한 물길이 들판을 가로질러 천정천(天井川) 제방을 따라 감천으로 들어가는 형국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현재 감천을 향해 용의 혀처럼 평야를 가로질렀다는 제방은 1970년대 경지 정리 과정에서 사라져 지금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고 ‘소용’이라는 지명도 세월의 흐름 속에 변하여 이제는 시영골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소용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언의(李彦儀)[1600~1637] 장군을 배출한 충절의 마을로서 마을 주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을 뒷산인 숫돌봉 끝단에는 의마총(義馬塚)으로 불리는 말 무덤과 그 말을 기리는 의마비(義馬碑)가 웅장하게 서 있다.
이언의 장군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병과 맞서 빛나는 공을 세우고 경기도 쌍령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그 며칠 뒤 마을 뒷산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려 나가 보니 이언의 장군이 타던 말이 피 묻은 갑옷을 물고 쓰러져 울기만 할 뿐 먹지도 않고 3일 만에 죽으니 후손들이 주인을 끝까지 섬긴 의로운 말의 죽음을 기리고자 말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말을 묻어 주고 무덤을 의마총이라 이름하고 뒤에 의마비를 세웠다.
끝내 이언의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후손들은 의마가 물고 온 피 묻은 장군의 갑옷을 의마총 맞은편에 묻고 의관장(衣冠葬)으로 대신했다. 나라에서는 이언의 장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해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렸고 후손들은 이언의 장군의 묘소 아래에 재실인 영모재를 세워 입향조인 진사 이근동과 아들인 충장공 이언의 장군의 위패를 모셨다.
평산은 1490년경 칠곡현감을 지낸 죽산 박씨(竹山朴氏) 박수간(朴守幹)이 이주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죽산 박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마을 주변의 산들이 야산을 이루며 평평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평산에는 문랑과 효랑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온다. 대대로 평산에 터를 잡고 살면서 예종 때 영의정을 배출하며 명문으로 이름을 떨치던 죽산 박씨 집안에 1709년(숙종 35) 현감을 역임한 대구의 대부호 박경여(朴景汝)가 명당으로 이름난 무안리 큰골 죽산 박씨 선산에 조부 묘를 무단 이장하면서 분란이 일어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박경여의 처사에 분개한 평산의 박수하(朴壽河)는 빼앗긴 명당을 되찾기 위해 경상감영에 고소하였으나 패소하자 상경하여 재차 상소하여 급기야 경상감사와의 분쟁으로 비화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사했다. 박수하의 두 딸 중 언니 문랑은 당시 19세로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박경여의 조부 묘를 파헤치다가 피살되니 아우인 효랑이 두 차례에 걸친 상경 투쟁으로 마침내 암행어사가 출두하게 되었다.
암행어사의 조사 활동조차 이런저런 이유로 지지부진하던 차에 언니 문랑의 시신을 확인해 보니 시신이 썩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서 그간의 사정이 세상에 알려지자 마침내 강상의 법도를 바로잡으라는 전국 유림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들고일어났다. 1724년 마침내 명당은 죽산 박씨 집안으로 되돌아가고 문랑과 효랑 두 자매에게는 정려가 내려졌다. 뒤에 효랑이 25세로 요절하자 영조는 친히 지은 정려명을 하사했다.
평산 맞은편의 후평은 1492년 경주 최씨 최하일(崔河一)이 경상남도 합천군 삼계(三溪)에서 이거하여 정착한 이래 대대로 경주 최씨 충렬공파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타처로 많이 떠나고 마을의 명맥만 잇고 있다. 도촌은 견양산(犬陽山) 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원래의 도촌은 언고개들 한가운데 있으면서 조마면에 속하였다가 1936년 수해 때 침수되어 폐동된 후 현재의 견양산 자락으로 마을을 옮기고 도촌이라 하였다. 달리 도고리라고도 한다.
견양산은 예부터 언고개를 중심으로 암캐가 양쪽으로 가랑이를 벌리고 있는 암캐음부설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으로, 실제로 인근 시영골에 살던 이씨가 늦도록 아들이 없어 고심하던 중 성주 벽진에 사는 유명한 지관의 말을 듣고 선친 묘를 암캐의 음부에 해당하는 자리로 이장한 뒤 득남했다는 일화가 전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