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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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墳 |
영어음역 | Gobun |
영어의미역 | Ancient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배성혁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 산재하고 있는 신라 시대의 무덤.
[개설]
김천 지역은 대체로 감천 수계의 범위에 속하는데, 최하류는 구미시 선산읍에 해당한다. 그 외 서부 지역인 증산면 일대가 성주·고령 방면으로 흐르는 대가천 상류 지대에 속하나 이 지역은 후대의 행정적 균형을 위해 인위적으로 편입한 지역이므로 원래의 김천 권역은 최하류를 일부 제외한 감천 유역권으로 볼 수 있다. 즉 김천 지역의 고분군은 감천 수계의 고분군이라고 할 수 있다.
김천 지역 고분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인접한 상주·구미·성주 지역에 비해 매우 드물게 이루어짐에 따라 일부 고분군,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내용만 밝혀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지표 조사 및 간단한 실측(實測)을 통해 그 양상이 알려진 고분군으로는 개령면 일대의 대규모 고분군인 서부리 고분군·동부리 고분군·양천리 고분군, 그리고 당시 ‘김천역 부근 고분군’으로 불렸던 성내동 고분, 유존 상태가 기록된 서부리의 장릉(獐陵) 혹은 장부인릉(獐夫人陵)으로 전해오는 봉토분, 감문면의 김효왕릉(金孝王陵)으로 전해 오는 봉토분뿐이다.
이처럼 일제 강점기부터 전해지는 김천 지역 고분군 현황은 비교적 소략한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 남쪽에 인접한 구미시[지금의 선산군 포함]와 성주군 이남의 고분군에 관한 관심이 높았던 점과 크게 대조를 보인다.
2009년 12월 현재까지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결과를 알 수 있는 김천 지역 고분군으로는 모암동 고분군, 성내동 고분군, 봉산면 덕천리 고분군, 아포읍 대신리 고분군, 남면 용전리 고분군과 부상리 고분군, 지례면 월곡리 고분군 등 7개 고분군이 있다. 이들 고분군은 모두 개발 공사를 위해 긴급 조사가 이루어진 것들이며, 그외 학술 자료 목적 혹은 정비 목적의 기획 조사는 전혀 이루어진 바 없다. 이 중 경부고속전철 구간의 모암동 1호분의 경우는 노선 곁으로 이전·복원되어 보존되고 있다.
김천 지역의 현존하는 최대 고분군은 감문면 문무리 고분군으로, 확인된 것만 275기 정도이며, 그것도 대다수가 봉분을 갖춘 것이라는 점에서 봉토분의 기수로만 본다면 어느 시군 단위의 최대 고분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 밖의 중요 고분군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김천 지역 봉토분은 대부분 내부 벽체를 판석으로 축조한 판석조 돌방분을 가장 많이 조성하였고, 6세기 중엽에 이르면 대체로 신라 묘제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유물인 토기는 재지적 요소도 있으나 대체로 신라 토기 권역에 포함된다.
[변천]
김천 지역 고분의 조사 내용은 지표 조사 과정에서 간략하게 실측된 것과 개발 공사에 따른 긴급 발굴 조사를 거친 고분의 발굴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김천 지역 고분군의 구조와 출토 유물에 대한 대체적인 추이를 알 수 있다.
김천 지역 고분은 삼국 시대의 일반적인 고분처럼 봉분의 형태가 원형이고 그 속의 매장 주체부는 하나인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내부 구조도 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竪穴式 石槨·竪穴式 石室墳],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 石室墳], 굴식 돌방무덤[橫穴式 石室墳], 화장골호(火葬骨壺) 등 다른 지역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김천 지역 봉토분의 내부 구조에서 보이는 특색이라면 대구 지역 이북인 경상북도 서북부에서 다수 나타나고 있는 판석조(板石造) 돌방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판석조 돌방은 매장 주체부의 벽체가 판석을 세워 축조된 것이며, 사용된 석재는 정밀하게 치석된 것이 아니라 대충 다듬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양상은 신라와 백제 및 가야권 고분의 벽체 구성에 있어 주로 할석이나 하천석을 정교하게 짜 맞추어 축조한 것과는 대조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 판석조 고분의 축조 시기는 영남 서북부에서는 대체로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전엽에 해당한다.
5세기 대 판석조 벽체를 구성한 대표적인 예는 일제 강점기에 간단한 실측이 이루어진 개령면 개령향교 북편 능선부에 있었다고 하는 가칭 동부동 1호분을 들 수 있다. 이 고분의 내부 구조는 성주군 성산동 고분군과 대구광역시 달서 고분군에서 보이는 돌방과 같이 판석으로 구성된 벽체 위에 대형의 판석 2매를 개석으로 덮은 구조이다.
공간 규모는 길이 4.39m, 너비 1.27m, 높이 1,29m로 영남 서북부의 판석조 고분으로서는 최대급에 해당한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폭이 좁은 판석조 고분들은 전술한 대형 판석조 돌방과 같은 축조 기법에 해당하지만 대부분 판석 자체가 조잡하고 작은 석재들을 여러 매 사용하여 벽석을 구축한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폭이 좁은 판석조 고분의 대표적인 예는 일제 강점기 당시 ‘김천역 부근 고분’으로 불렸던 봉토분이다. 그 고분군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현재 김천여자중학교 남동쪽으로 길게 뻗은 구릉에 분포한 고분군 중의 한 기이다. 이 고분군이 분포한 능선을 따라 동쪽은 모암동이고 서쪽은 성내동이므로 이 고분군을 성내·모암동 고분군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표 조사 과정에서 간단하게 실측된 그 고분의 공간 규모는 길이 4.55m, 너비 1m로 동부동 1호분보다 규모에 비해 너비가 좁은 편이다. 구조는 구덩식일 가능성이 높지만 축조 시점은 평면 형태상 동부동 1호분보다 세장한 형태이고 작은 벽체용의 판석이 여러 매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시기상 후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축조 시점은 전자가 5세기 중엽에서 후엽, 후자가 5세기 후엽에서 6세기 전엽으로 추정된다.
‘김천역 부근 고분’에 견주어 길이는 비슷하고 너비만 좁은 이른바 전형적인 세장방형을 갖춘 것은 모암동 1호분이다. 이 고분은 경부고속철도 공사 노선 안에 있어 발굴 조사된 여러 기의 고분 중 하나이다. 이 고분은 내부 구조의 벽체가 판석조이지만 앞트기식 돌방이라는 점이 다르며 추가장이 이루어졌다.
바닥 중앙의 시상부에는 큰 판석을 두었고 추가장할 때는 그 위에 별도로 부석한 시상을 설치했으며, 돌방 곁에서는 제사곽도 확인된다. 그러나 전술한 ‘김천역 부근 고분’의 경우는 발굴된 자료가 아니어서 이러한 요소들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두 고분들의 축조 시기는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한편 위의 두 고분이 판석조 구덩식인데 비해서 같은 일제 강점기 때 간단하게 실측된 개령 서부리 고분군의 한 고분은 할석조(割石造) 굴식 돌방이다. 내부 공간의 규모는 길이 1.48m, 너비 3.33m, 높이 1.39m이고 현실의 오른쪽에 연도를 달아 현실과 연도가 평면 ‘ㄱ’자형이 되었다. 연도 규모는 너비 0.88㎝, 길이 1.21m로 비교적 짧은 편이다.
이 굴식 돌방의 구조적 특징은 연도의 개석 윗면에 바로 현실 천정석을 올렸다는 점, 벽체가 수직 형태라는 점, 횡 방향의 세장한 평면 형태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굴식 구조와 차이가 있다. 서부리 고분군은 원래 동부리 고분군, 양천리 고분군과 합쳐 하나의 큰 고분군이었는데, 아마 이러한 특이한 구조가 나타나는 것은 이 고분이 전체 고분군 중 도입기에 축조된 굴식 돌방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초기의 굴식 돌방 구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기존의 재지 양식 구조를 나름대로 적용해서 변형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른 지역의 횡장방형 돌방이 대체로 6세기 후반 대에 들어서 각 고분군 내 주류 혹은 일부로 유행하기 시작한 경향으로 볼 때 그 축조 시점이 빠르다고 판단되므로 축조 시기는 대략 6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횡장방형 굴식 돌방 중에서는 가장 이른 단계의 고분이라고 할 수 있다.
6세기 중엽부터 7세기 전엽의 대표적인 고분은 모암동 1호분과 함께 경부고속철도 부지에서 발굴 조사된 모암동 고분군 일대의 앞트기식 돌방무덤들이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의 고분은 할석조의 장방형 앞트기식 돌방무덤인 제4호분이며 늦은 시기의 고분은 제24호분과 제3호분이다. 이 고분들은 동시기 신라 고분에서 흔히 보이는 높은 시상대(屍床臺)을 구비했으며 추가장 및 유물 부장은 박장(薄葬) 양상을 보인다.
한편 6세기 후엽으로 추정되는 제20호분은 앞트기식 돌방무덤이지만 판석조 벽체를 구비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고분에서는 찾기 어려운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김천 지역이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판석조 돌방이 대유행한 것처럼 그 잔영도 늦게까지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외 특이한 양상으로는 6세기 후반 대의 소형묘로서 목관을 두었다고 추정되는 구덩무덤에 개석을 덮은 이른바 석개토광묘 9기가 아포읍 대신리 고분군에서 발굴 조사되었다. 이러한 묘제는 매우 희소하게 나타나는 예로 삼국 시대 김천 지역의 묘제가 다양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인접 지역인 남면 용전리 고분군에서도 6세기 대 구덩무덤 12기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구덩무덤 중에서는 6세기 후엽에 조성된 것도 있어 대신리 고분군과 함께 아주 늦은 시기까지 김천 지역에 구덩무덤군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암리 고분군에서는 통일 신라의 뼈단지도 확인된 바 있다.
[현황]
김천 지역의 고분군은 현재 60여 곳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근래 들어 각종 개발 과정에서 새로운 고분군이 속속 발견되고 있어 실제로는 200여 곳 정도로 파악된다. 그러나 고분군의 규모와 분포 기수에 비해 발굴 조사된 예는 매우 적은 실정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지표 조사 과정에서 고분 3기에 대한 간단하게 실측 조사를 실시한 것이 전부였으며, 약간의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은 거의 모두 최근 10년 이내에 얻은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만으로 김천 지역 전체의 고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우며, 일부 발굴 성과를 통해 김천 지역 고분 문화의 개략적이고 부분적인 내용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김천 지역에서 개발로 인해 이전·복원된 고분은 모암동 1호분뿐이며, 발굴 조사된 고분은 발굴 조사 보고서를 통한 기록·보존 자료로만 존재하고 있다.
외관상 확인되는 고분은 거의 모두 도굴을 당해 훼손 상태가 심한 편인데, 특히 현존하는 김천 지역 최대 규모인 감문면 문무리 고분군의 경우도 온전한 상태의 봉토분은 거의 찾기 어렵다. 더욱이 고대 감문소국(甘文小國)의 고지(故地)의 주고분으로 추정되는 서부리·동부리·양천리 고분군의 경우에도 봉토는 대부분 유실되고 돌방 하나만 잔존하고 일대에서 잔존하는 봉토분도 20여 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더 이상 풍우와 인위적 훼손에 의한 유실을 당하지 않도록 중요 고분군 주변의 수목을 제거하고, 봉토 복원을 위한 성토 및 잔디 식재 등 고분군의 보호를 위한 조처가 절실한 상황이다. 더불어 향후 김천 지역의 중요한 문화유산 자원인 고분에 대해서는 그 역사성과 성격 파악을 위하여 기획 발굴 등을 통해 자세한 내용의 확보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