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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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淑琦 |
영어음역 | Yi Sukki |
이칭/별칭 | 공근(公瑾),정양(靖襄),연안군(延安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4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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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453년 |
활동 | 1456년 |
활동 | 1459년 |
활동 | 1467년 |
활동 | 1468년 |
활동 | 1470년 |
몰년 | 1489년 |
활동 | 1489년 |
특기 사항 | 2004년 1월 19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미평리 |
묘소|단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6-1 |
사당|배향지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
사당|배향지 |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53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연안(延安) |
대표 관직 | 호조판서 |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근(公瑾). 할아버지는 이백겸(李伯謙)이고, 아버지는 서울에서 지례현(知禮縣) 지품(知品)으로 낙향한 연성부원군 이말정(李末丁)이다. 외할아버지인 한옹(韓雍)은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다. 형은 이숙황(李淑璜), 이숙형(李淑珩), 이숙규(李淑珪)가 있고 동생은 이숙함(李淑瑊)이다. 부인은 홍씨이며, 아들로 홍문관수찬을 지낸 이세범(李世範)을 두었다.
[활동 사항]
이숙기(李淑琦)[1429~1489]는 1453년(단종 1) 무과에 급제하고 훈련원주부가 되었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참군으로 원종공신이 되었다. 1456년(세조 2)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사온서영(四醞署令)이 되었으며, 세조가 가전훈도(駕前訓導)로 삼아 열진(閱陣)할 때마다 명을 전하게 하였다. 1459년(세조 5) 평양판관이 되어 이듬해 세조의 대가를 맞이하였고, 영변판관으로 전임되었다. 공사를 엄격히 구분하고 과단한 일처리로 상하 간 신망이 두터웠다.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의 계책으로 북청 점거를 주장하여 시행하였고, 맹패장(猛牌將)으로 선봉에 서 남이(南怡)와 함께 가장 많이 사상(死傷)하여 공적이 높았다. 적들이 목책을 쌓고 요새를 만들었으나, 이숙기가 돌격하여 목채(木寨)의 문을 쳐부수면서 진압하였다. 이러한 공적으로 행사직(行司直) 당상관이 되고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해 겨울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3등 공을 세우고, 자헌대부로 승자하면서 노비 6구를 받았다. 세조의 신임이 두터워 중궁과 세자를 거느리고 온양으로 갈 때 좌사대장이 되어 보필하였고, 서현정(序賢亭) 주연에서 남이가 실언한 것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1468년(세조 14) 함경남도절도사가 되자 하번군사(下番軍士)를 헤아려서 거느리고 북도(北道)에 가서 북방의 방비에 만전을 기하였다. 예종은 새로 만든 총통(銃筒) 1,000자루, 화살 1만 통과 아울러 약장(藥匠) 5명을 보내 주었다. 1470년(성종 1) 영안남도절도사와 북청부사를 겸하고, 1471년 좌리공신이 되었다. 이후 지중추부사, 황해도관찰사, 전라도병마절도사, 형조참판을 거쳐 정조사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다. 이후 영안도관찰사,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지중추부사, 형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489년(성종 20) 호조판서가 되었다.
이숙기는 소갈증을 얻었으나 군무에 충실하여 무예와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성종은 수고로움을 치하하고 어의를 보내 치료하게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성격이 강하고 과단하며 제주와 기개가 있었고 사사로움으로 공(公)을 버리지 않았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 산6-1번지에 있다. 2004년 1월 19일에 용인시 향토유적 제56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일등 공신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도동서원(道東書院)과 구성면 상원리 53번지 원터마을에 불천위(不遷位) 사당인 정양공 사당(靖襄公祠堂)에 배향되었다. 1786년 정조는 지례 사람 이수태의 상언을 받아들여 정양(靖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