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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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烈祠 |
영어음역 | Chungnyeolsa |
영어의미역 | Chungnyeol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운남리 52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권상우 |
건립 | 18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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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운남리 521 |
성격 | 사당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1칸 반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운남리에 있는, 이곽을 기리기 위한 개항기의 사당.
[개설]
이곽(李廓)[1590~1665]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태종의 아들 경녕군(敬寧君) 이비(李비(示+非))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유인(李𥙿仁)이다.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1636년(인조 14) 이곽이 회답사(回答使)가 되어 청나라 심양(瀋陽)에 갔을 때, 심양에서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왕을 황제로,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하여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려고 할 때 이곽의 일행을 조선 사신으로 참여시키려고 하였으나, 결사적으로 항거하여 그 의식에 불참하고 돌아왔다. 이런 사실은 3년 뒤 서장관으로 연경에 갔던 심염조(沈念祖)가 이곽의 「불굴도(不屈圖)」를 얻어와 임금에게 고하면서 알려졌다. 그로부터 200여 년 뒤인 1878년(고종 15) 고종의 명으로 전국을 탐색하던 중 개령현감(開寧縣監) 김낙진(金洛鎭)이 김천시 남면 운남리 종상마을에 이곽의 후손이 있음을 알아내고 「불굴도」를 돌려주면서 충렬사를 짓게 하였다.
[변천]
1878년 이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국가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특별한 변화는 없다.
[형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건축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 기와집이다. 평면은 전면에 반 칸 규모의 개방된 툇간을 마련한 후,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구성하였다. 디딤돌 주석 위에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전면에만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위에는 이익공(二翼工)[촛가지가 돌로 된 익공]으로 장식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나무 부분에는 금모루[부재의 양쪽 끝이나 한쪽 끝에 머리초를 그리고, 중간이나 다른 부분에는 단색으로 칠하고 무늬를 넣는 단청] 단청으로 채색하였다.
[현황]
충렬사는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운남리 종상마을 뒤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 이르는 길이 따로 없어 민가를 통해 들어가야만 한다. 충렬사의 관리를 맡아야 할 직계 종손은 6·25 전쟁에 전사하고 그 어머니가 사당을 돌보고 있다. 후손들은 사당에 위패를 모시고 춘추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의의와 평가]
충렬사는 이곽이 청나라 건립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으로, 이러한 사당의 건립은 조선의 동북아 외교 관계에서 반청(反淸) 감정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